해남 항일운동의 역사적 교훈 오길록(해남항일의병·독립운동희생자 추모사업 추진위원장)
2010-07-18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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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년 전인 1592년 이순신장군과 해남출신 참모들은 유속이 빠른 우수영 울돌목을 이용해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격침시킨 세계적인 해전 승리를 장식한다.
그때 만약 130여척의 왜선이 울돌목을 통과했더라면 일본은 목포, 군산, 인천,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한양까지 진격했을 것이고, 조선은 강제 병합을 당했을 것이다.
101년 전인 1909년 7월 일본군의 신식무기에 맞선 해남·완도지역의 항일의병 60여명이 심적암에서 일본군에 대응한다.
그러나 7월 9일 일진회원들의 밀고를 받고 출동한 일본군헌병대의 기습공격을 받고 30여명의 의병들과 다섯 분의 스님이 심적암서 참살당하고 30여명은 부상을 입거나 도주한다.
그러나 살아남은 의병들도 일제에 의해 죽임을 당해 전체 65명의 항일의병들과 스님들이 순국한다.
1919년 기미년 3·1 조선독립만세운동에서는 양한묵 선생을 비롯한 75명이 해남읍과 우수영에서 만세시위를 벌여 형을 받았고, 양한묵 선생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1931년~34년 해남 북평면을 중심으로 광주시를 비롯한 9개 군에 걸쳐 전국 최대의 독립운동 결사단체인 전남운동협의회가 결성된다. 이 사건으로 558명이 체포되고 김홍배와 오문형씨 등 57명(해남출신 17명)이 구속 기소돼 1년~3년형을 선고받는다.
우리 해남에서만 257분이 항일운동에 연루돼 사망 또는 투옥된 것이다.
다행히도 그동안 삼산유적보존회와 장춘리 주민들이 심적암 의병투쟁을 기리기 위해 매년 정월 보름날에 제사를 모셔왔다.
이렇듯 전국에서 제일 규모가 큰 항일독립운동사건이 해남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지만 우리의 무관심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묻히고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이다”라는 격언이 있듯 250여 분의 순국열사와 애국지사들을 위한 추모사업에 많은 참여와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