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오련 추모 1주기, 그를 말한다.
2010-07-23 해남우리신문
|
국내 신기록만 50회, 평형을 제외하고 전 종목에서 한국 신기록을 세웠던 그의 50회 신기록도 아직껏 전무후무하다.
조오련은 1952년 해남읍 학동에서 태어난다. 어릴 때부터 수영에 소질을 보였던 그는 중1때 부모님 심부름 차 제주도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우연히 도 대표 수영선발대회를 지켜본다. 그리고 자신이라면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과 함께 수영선수에 대한 꿈을 품게 된다. 그러나 수영선수로 크기에는 가정살림이 녹녹치 못했다. 고1이 되자 그는 수영선수가 되겠다며 무작정 가출을 단행한다. 가출 후 서울에서 그가 한 일이란 간판집에서 막노동이었다. 1년 넘게 막노동을 한 그에게 기회가 왔다. 전국수영대회가 서울에서 열린 것이다. 학생신분이 아니었던 그는 일반부에 참가해 각 종목에서 우승을 거머쥔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무명의 선수가 혜성처럼 나타나 우승을 차지하자 수영계는 깜짝 놀란다. 수영계 인사들의 노력으로 서울 양정고등학교에 적을 두게 된 조오련은 고2때 아시안게임에 출전하게 된다. 그때도 그가 등수 안에 들 것이란 기대는 아무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시안 게임 수영 400미터에서 그는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건다. 대한민국이 열광했던 그의 금메달 소식, 그러나 그가 출전했던 400미터 대회엔 한국 기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메달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열린 1500미터 대회에는 한국 기자들도, 한국 국민들도 숨죽이고 지켜봤다. 또 하나의 금메달 추가. 한국 수영역사를 다시 쓰는 순간이었다.
4년 후에 열린 아시안 게임에서는 고려대에 적을 둔 선수로 출전해 다시 2관왕을 차지했다. 그것도 아시아 신기록까지 세우면서.
1980년은 광주민주화 운동으로 암울했던 시기였다. 이때 조오련은 대한해협을 횡단해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준다. 조오련 선수가 54km거리인 대한해협을 13시간 56분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민국은 큰 기쁨에 쌓였다. 특히 일본 선수가 이곳을 횡단하다 3~4km를 남겨두고 실패한 이후라 국민들은 더욱 열광했다.
1982년 조오련은 다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도버해협 38km 횡단에 성공해 명실공이 아시아의 물개로 떠오른다.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이름도 국민들 머릿속에 지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2005년 그는 두 아들과 함께 다시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3부자 독도 아리랑 프로젝트, 일본이 독도문제를 들고 나오자 그는 독도가 우리땅임을 알리기 위해 아들 둘과 함께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97km를 횡단한 것이다. 3부자가 릴레이로 횡단한 시간은 18시간. 횡단에 성공하자 다시 대한민국은 조오련을 주목했다. 그리고 그는 2008년 독도 33회 회영에 도전한다. 이때도 일본은 독도문제를 들고 나왔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조오련은 3·1독립운동을 선언한 33인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독도 33바퀴 도전해 성공한다. 그리고 대한해협 횡단 30주년 기념을 위해 대한해협 재도전을 위해 제주도에서 훈련하다 잠시 귀향했던 2009년 8월 4일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사망한다.
항상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정한 목표는 반드시 성공시킬 만큼 의지의 사나이로 불리었던 조오련은 2006년 귀향해 계곡면 법곡리에 터를 마련한다. 이곳에서 찾아오는 지인들을 반기며 생활했던 그는 잔정도 많았고 항상 자신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했던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박영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