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불꽃처럼 나비처럼’주인공 해남현감 김중현일까
2010-08-23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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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구한 덕에 군졸에서 해남현감으로 신분상승
명성황후를 주제로 한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명성황후와 그를 사랑한 호위무사 무명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조선말기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나라를 지키려는 명성황후와 그를 사랑한 호위무사 무명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고산유적지의 추원당과 녹우당 돌담길에서 한 장면이 촬영되지요.
세상에 존재를 알리지 않은 채 자객으로 살아가던 무명에게 어느 날, 한 여인이 다가옵니다. 자신과 너무도 다른 여인인 자영을 만나게 되지요. 하지만 그녀는 곧 황후가 될 몸입니다. 왕 외에 하늘 아래 누구도 그녀를 가질 수 없다면, 자영을 죽음까지 지켜주겠다고 다짐한 무명은 입궁 시험에 통과해 그녀의 호위무사가 됩니다.
이 영화는 비극으로 끝을 맺습니다. 마지막까지 자영을 지키려했던 무명은 자영과 함께 일본군의 칼에 죽임을 당합니다.
야설록의 대하소설 원작 ‘불꽃처럼 나비처럼’을 각색한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도올 선생의 증조부인 김중현이 떠오릅니다.
김중현은 명성황후와의 극적인 만남을 통해 해남현감 벼슬을 얻게 된 인물입니다.
김중현은 충북제천에서 태어나 3살 때 아버지를 여읩니다. 홀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옮겨온 그는 유기그릇을 만드는 공방에서 잡일을 하며 어머니를 봉양하지요.
비천한 계급으로 어렵게 생활하던 그에게 궁궐을 수비하는 군졸 일이 주어집니다. 궁궐을 수비하는 일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가 신분적으로 상승하거나 궁핍함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요. 다만 안정적인 직장을 얻었다고 할까요.
당시는 정세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조선은 열강들의 앞다툰 침탈 앞에 숨 쉬기도 어려웠고 대원군의 수구파와 명상황후의 개화파간의 대립도 치열한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때는 명성황후를 정점으로 하는 개화파가 정권을 잡은 시기였지요.
개화파는 일본의 힘을 빌려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합니다. 이에 구식군대인 하급군병들과 백성들이 민씨세력에 반발해 민란을 일으킵니다. 일명 임오군란이지요.
1882년 6월 10일, 이들은 궁궐을 급습합니다. 민란의 주축 세력은 창덕궁을 기습하고 선혜청 당상 민겸호와 김보현을 살해한 후 명성황후를 찾기 위해 궁궐을 대대적으로 수색합니다.
물론 이들의 뒤에는 대원군이 버티고 있었지요.
궁궐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맙니다. 불 속에서, 자신을 찾는 민란세력들을 피하기 위해 명성황후는 급히 궁녀로 변장을 합니다. 궁녀로 위장한 채 현장을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치는 명성황후의 모습이 하위 군졸이었던 김중현의 눈에 띕니다.
국모를 발견한 김중현은 앞뒤 생각없이 명성황후를 업고 뛰기 시작합니다. 누가 물으면 궁녀로 있던 누이라고 대답하며 궁궐을 빠져나오지요.
김중현은 궁궐을 무사히 빠져나왔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지요.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도 이때의 장면이 나옵니다. 명성황후를 등에 업고 피신 길에 오른 무명과 황후는 산속 어느 허름한 건물에서 꿈같은 밤을 지내지요. 그리고 무명의 도움을 받아 명성황후는 이후 다시 권력을 손에 쥐게 됩니다.
다시 김중현의 이야기로 되돌아가봅시다. 국모를 등에 업고 헤매던 김중현이 도착한 곳이 농포원 즉 현재의 권농동인 전 씨네 집이었습니다. 이곳으로의 피신은 황후가 원했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김중현은 전 씨 집에 도착하자마자 도망을 칩니다. 일개 군졸 신분으로 황후를 등에 업은, 용서받지 못할 행위를 했으니까요.
김중현이 도망을 친 후 명성황후는 화개동 윤태준의 집을 거쳐 충주 장호원에서 피신생활을 합니다. 명성황후는 한 달이 넘는 피신생활 동안 철저히 신분을 감춥니다.
역사서에서는 이때의 장면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궁녀의 옷으로 변장한 명성황후는 무예별감(武藝別監) 홍계훈(洪啓薰)의 도움으로 충주 장호원(長湖院)의 충주목사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피신했다라고.
명성황후가 사라진 후 권력을 잡은 대원군은 국모가 죽었음을 공식 선언하고 국상까지 치릅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청나라의 도움을 얻어 다시 정권을 잡습니다.
명성황후가 다시 등장한 후에도 김중현은 숨어 지냅니다. 대원군이 정권을 잡을 때는 황후를 구한 자신의 일이 발각될까 두려웠고 황후가 집권한 후에는 국모를 등에 업었다는 이유로 벌을 받을까 두려웠던 것이지요. 그러나 권력을 다시 잡은 명성황후는 김중현을 찾습니다.
김중현은 노심초사한 마음으로 황후 앞에 섭니다. 겁을 먹은 김중현에게 황후는 오라버니라고 부르며 감사함을 전합니다. 그리고 흥양감목관을 제수합니다.
1886년 다시 종 6품에 올라 해남현감으로 부임한 김중현은 이후 의정부중추원 칙임의관, 1908년에는 일등공신으로 표창을 받는 등 각종 명예도 얻습니다. 또한 영암군수를 지내면서 해남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갑니다. 당시에는 송지면과 옥천면, 북평면이 영암에 소속된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김중현은 해남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충북에 있던 아버지 묘를 해남 북평면 남창 인근으로 이장합니다.
해남의 새로운 세도가로 성장하기 시작한 김중현은 1889년 풍천부사, 동래수군 절도사, 1898년에는 종2품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하지요.
1992년 도울은 옥천면 학동에 있는 증조부인 김중현의 묘비를 정비하면서 김중현이 해남에 내려오게 된 내력을 자세히 기록합니다.
도울은 중조부인 김중현이 군졸 출신이고 이전에는 유기그릇을 굽는 잡부였다는 사실도 숨김없이 묘비에 기록하지요.
그리고 명성황후를 구해 벼슬을 얻는 과정도 소상히 묘사합니다. 물론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 나오는 호위무사 무명이 김중현을 모티브로 했다는 내용은 찾기 힘듭니다. 그러나 서로가 너무도 닮았다는 사실을 쉬이 떨쳐버리기 힘듭니다.
한편 해남에는 도올 선생 증조부인 김중현을 비롯해 도올의 고조와 조부 묘도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