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화가 공재를 만나다 - 공재와 쿠르베‘석공’작품 비교
2010-09-03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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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풍속화, 유럽의 사실주의 화풍 열어
공재 윤두서(1668~1715)는 참 백성을 사랑했던 문인화가였습니다. 그의 풍속화 작품을 보고 있으면 잔잔하면서도 뭉클한 무엇인가가 가슴에 내려앉습니다. 마음도 참 따뜻해집니다.
공재는 우리나라에 풍속화를 처음 선보인 화가입니다. 화원 출신도 아닌 양반 출신인 그가 백성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는 것은 당시엔 너무도 혁신적인 일이었지요.
정적인 풍속화를 주로 그렸던 공재 작품 중 예외적인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돌 깨는 사람들, 즉 석공입니다. 공교롭게도 공재의 석공은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 (1819~1877)의 작품 석공과 제목이 같아 비교가 되곤 하지요. 공재가 백성들의 모습을 최초로 화폭에 담은 풍속화의 선구자였다면, 쿠르베는 백성들의 모습을 생생히 표현한 사실주의 화풍의 선구자였지요.
살았던 시대가 다르고 동양과 서양이라는 공간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돌을 깨는 사람들이라는 작품을 남깁니다.
먼저 공재의 작품 석공을 볼까요. 한 사람은 정을 붙잡고 있고 한 사람은 망치를 막 내려치려 합니다. 정을 붙잡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 관람자에게 긴장감을 줍니다. 혹 자신에게 돌이 튀지는 않을까. 내려치려는 망치가 자신의 손을 내려치지나 않을까 하는 긴장감이 그대로 묻어나 있는 표정입니다. 공재는 긴장감을 그 사람의 표정에, 약간 상체를 모로 틀고 있는 모습에 그대로 옮겨 담았습니다.
잔뜩 긴장한 채 정을 붙잡고 있는 사람과 달리 망치를 내려치려는 사람의 표정은 잔뜩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단 한 번의 망치질로 돌을 깨겠다는 의지가 느껴질 만큼 온 몸에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얼굴에도 몸에도 다리에도 근육이 팽팽합니다. 등 근육과 어깨 근육이 더욱 그렇습니다.
아마 공재는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석공들의 모습을 보고 또 보고 했겠지요. 그들의 표정과 몸의 자세를 완전히 체득한 후에 붓을 들었겠지요.
공재의 석공 작품은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을 해학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김홍도의 풍속화 작품처럼 말입니다.
부유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귀스타브 쿠르베는 19세기 프랑스 출신 화가입니다.
귀족도 부르주아도 아니었던 쿠르베는 평민의 입장에서 바라본 사회를 작품 속에 담고자 했습니다. 당시 프랑스 혁명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그는 이러한 신념을 작품에 담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석공입니다.
쿠르베 이전까지만 해도 서민들의 삶을 이렇게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가는 없었지요.
그의 작품에는 이상적인 외모를 가진 신체도, 권위 있는 신분도 없습니다. 단지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계급이 있을 뿐입니다. 쿠르베는 사회의 진실한 모습을 예술에 담으려 했지만 이 작품이 1850년 파리의 살롱전에 전시됐을 때는 많은 이들의 비난을 받게 됩니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 작품은 너무도 추한 것이었습니다. 예술이란 세상의 아름다움을 담고 이상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게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었지요.
그러나 그의 사실주의 경향은 19세기 후반 젊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보는 것을 그대로 그리는 그의 사실주의 경향은 19세기 인상주의의 선구가 되었고 독일·벨기에·러시아 등의 미술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물론 공재의 작품과 쿠르베의 작품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공재는 석공들의 모습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반면 쿠르베는 비참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했으니까요. 쿠르베는 세상에 대한 도전으로 이들의 비참한 삶을 보려주려 했던 것입니다.
같은 주제인데도 불구하고 너무도 달리 표현한 이 작품들은 아마도 시대적 배경이 서로 다르고 민족적 정서가 서로 다른데서 기인했을 것입니다.
공재의 작품은 아마 자연에 대한 목가적인 인식과 노동의 신성함과 즐거움, 해학적인 우리민족의 사상이 배어 있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와 달리 쿠르베는 프랑스혁명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활동한 화가입니다. 또한 자연보다는 인물에 초점을 맞춘 서양화의 경향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서민들의 삶을 담고 있다는 점에선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양반의 신분으로 신선이 아닌 백성들을 그린 공재나 인위적인 것을 배제하고 비천하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을 그린 쿠르베나, 둘 다 서민들의 삶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했겠지요.
공재의 풍속화는 이후 김홍도와 신윤복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우리나라에 풍속화의 서막을 열었던 것이지요. 쿠르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사실주의 화풍은 이후 유럽에 인상주의와 사실주의라는 화풍이 탄생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되지요.
박영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