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당시 해남군민광장은 민주광장이었다

해남 5곳 도 사적지 지정 군민광장·대흥사·우슬재 등

2020-05-11     박영자 기자
해남군민광장과 구 광주은행 인근은 해남군민들이 시위를 계획하고 토론하는 민주광장이었다.(사진 故천임식씨 촬영)

 

 해남군민광장은 5·18 당시 해남군민들이 시위를 계획하고 토론하는 민주광장이었다. 1980년 5월21일부터 23일까지 3일간 군민광장은 토론장이자 해방구였고 이곳을 중심으로 시위는 해남전역으로, 강진과 완도군 등으로 확대됐다. 당시 군민광장에는 해남경찰서와 해남교육청이,그 앞에는 버스터미널이 위치해 있었다.    
1980년 5월18일 광주에서 촉발된 민중항쟁은 5월21일 해남군으로까지 확대됐다. 21일 광주에서 시위차량이 해남에 도착하자 해남군민들도 군민광장으로 몰려들었는데 그 수가 3,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23일까지 군청 앞은 시위대의 중심지가 됐다. 시위대들은 해남경찰서를 비롯한 계곡지서와 옥천, 화산, 월송, 우수영지서 등지에서 M1소총, 카빈, 수류탄 등 무기를 획득해 무장했고 해남읍교회 여성신도들은 주먹밥을 만들어 시위대에 제공했다. 
전라남도는 해남군청 앞 군민광장 등 전남 8개 시군 25곳을 5·18사적지로 지정 고시했다.  전남도는 시군별 주요 항쟁지와 희생자 발생지 등 역사적 대표성이 뚜렷한 곳을 5·18사적지로 지정했는데 해남지역은 5곳이 포함됐다. 해남군민광장과 우슬재, 마산면 상등리, 대흥사 구 주차장 앞, 해남중학교 교정 등이다. 읍 백야리 군부대 앞은 전남도 사적지 지정에서 제외됐다. 이곳에는 모두 해남군이 건립한 5·18기념비가 서 있다. 
▲이번 전남도 5·18사적지 지정에 포함된 우슬재에선 총격전이 발생했다. 계엄사 상황일지에 따르면 ‘우슬재에서 폭도 2명 검거, M1 1정, 카빈 실탄 55발 노획’이라고 쓰여 있다. 증언자들에 따르면 군인들의 수류탄 투척과 총격으로 현장에서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다수 발생했다고 밝히고 있다. 
▲마산 상등리 도로에서도 해남군부대의 발포로 사망자가 발생했다. 계엄사 상황일지에는 ‘해남 황산면 폭도 40명 도로차단으로 아군 병력과 교전, 폭도 1명 사망, 2명 부상, 연행 및 귀가조치’라고 쓰여 있다.
▲대흥사 구 주차장 인근은 1980년 5월21일 대흥사에서 바자회를 하던 JC회원들이 광주의 소식을 접한 후 시위를 모의한 장소였고 시위대 일부는 유선여관과 안흥여관 등에서 시위를 계획했다. 이후 해남JC회원들은 옥천 용동에 숨겨져 있던 광주고속 버스와 대한통운 트럭 등을 끌고 나와 해남 전역을 돌며 시위를 주도했다. 또 이때 확보한 버스와 트럭으로 강진, 완도 등지로 항쟁의 불씨를 옮기고 영암과 나주, 목포시를 돌며 연대를 강화했다. 
▲광주민주항쟁 해남시위 과정에서 해남중·고생들의 활약도 컸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해남중학교 교정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번 전남 사적지에서 제외된 해남읍 백야리 군부대 앞 국도상에서도 총격전이 벌어졌다. 5·18해남민중항쟁증언록에 의하면 5월23일 시위버스 1대가 군의 총격으로 전복돼 다수의 사망과 중경상자 발생했고 24일에는 완도에서 해남으로 올라온 시위대 버스 7대가 백야리 군부대 앞에서 군과 대치했다고 적고 있다. 
한편 해남은 향토사단에 의한 발포로 사망자가 발생했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