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 최대 가마터 해남, 중국 월주의 청자기술

최치원 왕래했던 바닷길 따라 화원면에 유입

2020-06-29     변남주/국민대 연구교수

글 싣는 순서
①해남청자 요지, 고려 최대 관요로 우뚝 서다 

②화원 초기청자, 왕건의 통일 기반을 닦다
③산이 철화청자, 거란의 도공이 전했다

중국도 인정한 천하제일 고려청자 비색

청자는 세계에서 유이(有二)하게도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만 생산했다. 2천여 년 전에 중국에서 생산된 청자는 1천여 년 전 우리나라로 유입됐다. 그곳이 해남군 화원면이다. 중국인들은 고려청자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1123년 사신선을 타고 고려의 개경에 도착한 중국 송나라 서긍(徐兢, 1091~1153)은 개경에서 고려청자를 처음 접했다. 그는『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푸른 빛의 청자를 놓고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 하고 장인은 모두 관에 속한다〔官窯〕”고 기록했다. 또 남송의 유명한 학자 태평노인(太平老人)은『수중금(袖中錦)』에서 ‘천하제일의 비색’이라 칭송했다. 고려청자는 천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찬란한 빛을 발하니 ‘천년의 신비’라고도 한다. 
고려상감청자는 금·은 등 금속에 사용되던 상감기술을 청자에 적용한 독창성과 예술성 때문에 청자 종주국인 중국에서도 찬사를 받았다. 고려청자 편들은 오늘날 일본, 중국, 몽골, 오끼나와 등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고려 상감청자는 산이면 진산리에서 출발해 강진군과 부안군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생산됐다. 

1998년 화원면 사동리 인근 가마터 주변에서 발견된 초기청자 파편.

 

해남에서 최대 규모 260여 가마터 확인

해남청자는 고려시대 해남지역에서 생산된 청자를 말한다. 해남청자는 크게 두 지역의 가마에서 생산되었는데 그 규모의 합이 250~260여 기에 이른다. 
먼저 화원면 청자는 우리나라 청자 발생기에 운영된 가마이기에 초기청자라 부른다. 화원면 신덕리 뱀골마을을 중심으로 금평리 절골마을에서 주로 생산됐다. 가마터〔窯址〕규모는 3차례 지표조사 결과 총 70여 기가 한곳에 집중 분포한 것으로 나타났고 개별 가마까지 합하면 90∼100여 기에 이른다. 
산이면 청자는 철화청자(황토로 문양을 나타낸 청자)가 대표이다. 가마터는 산이면 진산리를 중심으로 초송리에서 집중 발견됐다. 1984년 첫 지표조사에서 100여기의 가마터가 조사됐는데 올해 초 정밀지표조사 결과 60여 곳이 더 추가됐다. 이 결과 해남청자 요지는 총 260여 기에 이르게 됐다. 지표조사 결과로만 봐도 강진군 청자 요지 188기, 전라북도 부안군 40여 기 보다 많아 해남이 고려시대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청자 생산지였음이 확인됐다. 가마터 규모는 단순히 산술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라 대규모 집단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문화적 의미가 커 그 가치가 더 빛난다 하겠다. 

화원 초기청자에서 산이 철화청자로 발전

북한에서 발견된 청화 세숫대, 제작 기법으로 보아 산이면에서 생산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남 청자요지의 역사는 다른 지역과 다르게 점이 아니라 선으로 나타난다. 즉, 화원면의 초기청자에 이어 산이면에서 중단 없이 생산되고 발달돼 간 것이다. 
해남청자는 화원면에서 장식이 없는 무문청자에서 출발했다. 이러한 무문청자 기술이 산이면으로 전래돼 문양이 있는 철화청자로 변화했다. 또 철화청자의 문양기법을 이용해 ‘시원적인 상감’ 기법으로까지 발전시켰다. 화원면에선 단순한 소형 음식기인 찻잔, 발, 접시, 잔탁 등의 청자기종을 생산하다가 산이면에 와서는 품종이 다양해졌다. 악기인 장고, 매병, 세숫대, 주전자 등을 보태 생산한 것이다. 
찻잔인 완은 화원에선 처음 중국식인 내저곡면(둥글넙적하고, 굽 크기 6.5㎝)으로 만들다가 산이면에 와서는 퇴화 해무리굽(굽 크기 5.5~4.5㎝)으로 변화를 보인다. 또 해남청자는 우리의 전통적인 흙가마에 중국의 도자기 제작기술을 받아들여 청자를 생산했고, 우리의 전통적인 기술로 흑자·도기로 저장용기도 만들었다. 
이렇듯 해남청자는 학술적으로 고려청자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최근 들어 학술적 가치가 높아진 해남청자 도요지는 강진군, 부안군과 공동으로 유네스코 세계유형문화유산 등재를 준비 중에 있다.

 

화원 사동리에서 발견된 청자 해무리굽 파편, 9세기 전반 중국 월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화원은 변방 아닌 해로 교통의 요충지  

해남청자 요지는 국내 최대 규모이다. 또 당시에는 최첨단 세라믹 산업단지였다. 그만큼 해남이 청자생산의 조건을 갖춘 최적지였던 것이다. 
대규모 청자요지가 발견된 화원반도와 산이반도는 서로 서남해안의 모서리에 위치하며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송지면 토말이 위도상으로는 한반도 남단이지만 고대로부터 해남 땅끝은 화원반도인 화원면 매월리 끝단을 일컬었던 지명이다. 이곳은 육로로는 변방이지만 중국, 서해, 남해로 통하는 해상물길과 영산강으로 통하는 강상물길을 동시에 확보하고 있어 뱃길로는 최고의 요충지였다. 
지금까지 청자산업 발달의 3요소로 태토와 물, 화목을 꼽고 있으나 필자는 이보다 더 중요한 요소로 해상교통을 꼽는다. 해상교통이 발달돼야 선진적인 청자 제작기술의 유입이 가능하고 또 소비처로의 운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규모의 산업 발달은 생산보다 판매가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 청자산업 발달의 3요소를 충족하는 곳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여기에 해상교통까지 갖춘 곳은 많지 않다. 또 청자제작기술의 유입은 내륙에도 가능하지만 대량유통은 반드시 해로의 요충지이어야 했다. 예컨대 진안이나 대구 같은 내륙에 있는 초기청자 요지의 경우는 유통이 어려워 소규모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통 흙가마에서 중국식 청자 생산

중국의 청자제작 기술은 황해바다를 통해 화원면으로 유입됐다.
여기에 영암군 구림도기의 전통기술이 영산강 뱃길을 통해 화원면으로 전해졌고 화원면 청자기술은 산이면으로 이어졌다. 해남에서 생산된 청자는 해로를 통해 전국 수요처로 공급됐다. 1984년 완도 어두리 해저에서 3만673점, 2003년 9월 군산 십이동파도에서 8,000여 점의 산이면 생산 청자가 인양돼 해남청자가 전국으로 유통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1984년 완도 어두리 바다에서 인양된 산이 철화청자는 당시 최고의 청자로 전국에 유통됐다.

 

 중국 월주청자 생산지와 화원은 해로로 연결

중국의 월주청자는 절강성 동북부에 위치한 월주지역에서 생산한 청자를 말한다. 월주는 중국청자의 발상지이며 특히 9~10세기에 자계시 상림호수 일대에서 생산된 월주청자는 비색(秘色)으로 전성기 청자로 유명하다. 
당시 월주청자의 수출항은 영파(寧波, 항주의 동쪽)였다. 이 영파와 해남청자 요지가 생산된 한반도 서남단은 해로로 연결돼 있었고 이 해로가 
흑산도를 경유하므로 ‘한·중 흑산도해로’라 칭했다. 한·중 흑산도 해로는 해남청자 제자기술 유입과 밀접히 연관돼 있다. 
통일신라 시기 영암 구림리는 중국으로 떠나는 선승과 유생들을 실은 상선의 진출입로였다. 
조선 후기 이중환(李重煥)의『택리지』에 “월출산 서쪽 구림촌은 신라에서 당나라로 조공 갈 때에 모두 이 고을 바닷가에서 떠났다. 바닷길을 하루 가면 흑산도에 이르고, 흑산도에서 또 하루를 가면 홍의도(홍도)에 이른다. 다시 하루를 가면 가가도(可佳島, 가거도)에 이르고, 간방(艮方:북동) 바람을 만나면 3일이면 태주 영파부 정해현에 도착하게 되는데 실제로 순풍을 만나면 하루 만에 도착할 수도 있다. 
남송이 고려와 통행할 때 정해현 바닷가에서 배를 출발시켜 7일 만에 고려경계에 이르고 뭍에 올랐다는 곳이 바로 이 지역이다. 당나라 때 신라 사람이 바다를 건너서 당나라에 들어간 것이 지금 통진(通津:강화도) 건널목이다. 그 당시 최치원, 김가기, 최승우는 상선에 편승하고 당나라에 들어가 당나라의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 글에서 등장하는 신라 말 최치원이 당나라에 유학할 당시 나이는 12살이었다. 

최치원의 서동사 창건설화와 한·중 흑산도 해로
 
화원 청자요지가 있는 서동사의 창건주가 최치원(857~?)이라는 설화는 주목할 만하다.
화원면에는 ‘당나라로 가는 포구’라는 의미의 당포(唐浦) 지명이 존재한다. 영암의 해상에서 출발하면 반드시 당포를 지나 비금·도초 사이를 지나 흑산도(우이도)로 향한다. 
최치원 관련 설화는 화원, 비금, 우이도에 모두 존재하는데 이를 연결하면 한·중 흑산도해로가 된다. 이는 설화를 넘어 역사성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한·중 흑산도 해로는 한반도 서남단 지역에서 흑산도를 경유해 중국의 월주청자 생산지인 절강성 동북부 월주지역과 통하는 해로이다.
이 해로를 통해 중국 월주청자 기술이 유입됐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 해로를 통한 왕래는 서해바다의 해류가 계절에 따라 흐름이 바뀌는 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황해해류는 흑산도 인근을 기준으로 동절기에는 한류가 발달해 남류하고, 하절기에는 난류가 발달해 북류한다. 
동절기는 양력 10월부터 12월까지로 0.5〜0.9 노트의 해류가 우리나라 서남해에서 남서방향으로 흘러 절강성 인근에 이른다. 반면 하절기는 양력 6월에서 8월까지로 0.3〜0.5 노트의 해류가 중국 남쪽에서 한반도 서남해안으로 올라온다. 해류만 본다면 중국으로 갈 때가 올 때보다 빠르다고 할 수 있다.  
중국으로 향할 때는 가을철에 남쪽으로 흐르는 해류와 북풍 계열의 바람을 이용하면『택리지』의 기록대로 순항할 수가 있다. 
반면 입국할 때는 봄철에 올라오는 해류와 남풍 계열의 바람을 받으면 서남해지역에 순조롭게 이른다. 이러한 한·중 흑산도해로에서 화원반도와 산이반도는 한반도 육지부에서 첫 기착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