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화원 초기청자, 왕건의 통일 기반 닦다

태조 왕건이 탐낸 화원 도요지, 가마터만 170여기 고려초 전국 최대 규모로 최고급 청자 생산

2020-07-06     변남주 국민대 연구교수

 

왕건, 황원현을 군으로 승격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940년, 정국이 안정되자 전국 지방체제 개편에 나선다. 이때 해남에는 3개의 현이 존재했는데 황원현과 해남현, 죽산현이 그것이다. 그런데 화원반도에 있던 황원현만 특별히 황원군으로 승격시킨 후 나머지 현과 함께 영암군의 속군으로 귀속시킨다. 그리고 지방관이나 감무를 파견하지 않고 영암군이 직접 관할했다. 
황원현만 유일하게 군으로 승격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곳에 존재한 대규모 초기청자 요지의 발견으로 그 실마리가 풀린다. 
황원군의 읍치는 일성산 남쪽 문내면 고당리에 위치했다. 이 일대에선 지금도 화원면의 초기청자와 산이면에서 생산된 청자와 기왓편이 대량 출토되고 있다. 이런 역사를 감안해 화원면 청자요지는 10세기 전반에 운영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10세기 말기에 이르러 산이면으로 이동된 듯하다. 

국내 최대 초기청자 생산지

  세계에서 청자를 생산한 나라는 중국과 한국뿐이다. 최근 통설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10세기 무렵 청자 또는 백자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통칭해 ‘초기청자’라 칭한다. 화원 초기청자 요지는 1998년 6월 초 한 등산인이 신고하면서 알려졌다. 초기청자를 처음 접한 필자는 녹색 빛이었던 관계로 ‘녹자(綠瓷)’라 가칭하고 가마터 찾기에 몰두했다. 아울러 경주 안압지, 일본 규슈의 고로칸, 중국의 월주요 그리고 국내의 고창, 장흥, 고흥, 용인, 시흥 방산요 등 현장을 견학하기도 했다. 
화원요지는 2019년 말 3차 정밀지표조사로 10여 기가 더 발견돼 총 규모가 70여 곳에 이르고 개별 가마도 산비탈 등에 100여 기나 존재한다. 
한국에서 고려시대 초기의 가마터가 발견된 시군은 10여 곳, 그러나 가마 개수는 2~3기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화원은 국내 유일한 대규모 가마 유적지이다. 당시 이곳의 사회문화적 가치와 영향력이 지대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화원 청자요지는 한국 청자발생의 단서와 초기청자의 기형 변화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화원 청자요지 왕건이 장악
 
후삼국을 놓고 왕건과 견훤이 대립하고 있을 때인 903년 3월 태조 왕건은 해군 함대를 이끌고 나주이남 10여 군현을 쟁취한데 이어 909년 6월 진도, 고이도, 덕진포해전 등을 통해 서남해안의 정벌활동을 전개했다. 영산강 물길 초입에 있는 화원반도를 중심에 두고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들이다. 그리고 화원반도에는 부의 상징인 최대 규모의 초기청자요지가 있었다.『고려사』둔전(屯田)조 등 기록에 의하면 왕건은 정복지역에서 나오는 물산과 나주의 오다련, 영암의 최지몽(907~987), 무위사의 형미(864∼917) 등 서남해안 세력의 후원을 받아 후삼국을 통일했다.
화원면 청자요지의 운영시기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고고학적 운영시기는 학술조사가 활발히 진행되면 풀릴 것으로 보이지만 필자의 견해는 왕건이 활동했던 시기와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란 주장이다.

최고급 해무리굽 찻잔 생산

당시 화원도요지에선 최고급 청자인 해무리굽 찻잔이 생산됐다. 찻잔 밑이 해무리처럼 둥글게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에서는 장식품 옥벽을 닮아 ‘옥벽저(玉璧底)’라 칭했다.
해무리굽은 중국 월주요에서 850년 무렵까지 생산되다 단종된다. 특히 중국 월주요 찻잔은 인공으로 만든 옥으로 취급돼 금의 무게로 거래됐다. 따라서 화원요지를 운영한 이는 중국의 해무리굽 기술을 도립해 고려에 맞은 해무리굽 찻잔을 생산, 이를 국산화했다. 
최고급 상품이었던 해무리굽 찻잔은 갑발 안에 1개씩 넣어 구웠다. 발이나 접시, 종지기는 갑발 안에 8~10개 정도를 포개 구웠던 것에 비해 갑발 안에 1개만 구웠다는 것은 해무리굽 찻잔이 그만큼 고급청자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급스럽게 제작된 찻잔은 화원요지의 주력상품이었고 바닷길을 따라 전국으로 유통됐다. 
화원에서의 초기청자 생산은 불교와 깊은 연관이 있다. 9~10세기 선승들은 당나라를 왕래하며 불교 선종을 접했고 귀국 후 구산선문(九山禪門)을 개창했다. 이 시기 화원반도는 중국과 왕래하는 해상교통로였고 또 영산강과 연결돼 있어 선승들도 이 길을 이용했다.
불교의 융성은 차 문화의 융성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화원요지 운영자는 중국의 해무리굽이라는 선진기술을 도입해 고급 찻잔을 생산했다. 당연히 차문화의 융성으로 찻잔 수요도 높았다. 9~10세기 전성기를 누렸던 화원도요지는 한국 청자발생의 기원이자 왕건이 탐낸 도자기 생산기지였다. 
 

화원, 한국청자 집단발생지

고려초기 가마양식은 중부지역의 경우 벽돌가마(약 40m), 남부지역은 흙가마(10~20m)로 시작됐다. 그리고 도자기 학계에선 중부지역 시흥 방산요 벽돌가마를 청자발생의 시원으로 보는 견해가 많았다. 
방산요는 중국식 벽돌가마를 수용한 후 흙가마로 변화된다. 이러한 중부지역 가마의 변화를 남부에도 그대로 적용해 남부의 흙가마도 방산요의 벽돌가마에서 시작됐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필자는 남부지역의 흙가마를 중부지역에서 수용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비색청자는 산소를 차단한 환원염에서만 생산이 가능한데, 방산요에서 생산된 초기의 청자는 청색 빛이 아니라 황갈 빛이다. 이는 대형 벽돌가마에선 산소를 완벽하게 차단하기 어려웠다는 증거이다. 
바꿔 말하면 청자는 소형 흙가마에서 더 고급 품질을 생산하는데 유리하다. 따라서 화원을 비롯한 남부지역은 전통의 흙가마에서 고급의 청자를 생산해 내고 있었고, 이 첨단기술을 중부지역 벽돌가마에서 수용한 것으로 봐야 온당하다. 
그 실례로 중부지역은 극소량 청자와 백자를 생산한 반면 남부지역은 청자와 흑자를 대량 생산했다. 또 굽는 기법과 도구(고리형 받침 등)도 완전히 달랐다. 
결정적으로 중부지역에서는 주전자, 철화장고가 생산됐으나 이러한 새로운 기종과 철화는 화원면의 기술을 이어받은 산이면 청자요지 2단계에 가서야 등장한다. 
화원의 초기청자가 방산요 보다 빠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이다.
또 중국의 경우 남청북백(南靑北白) 즉, 남부는 월주청자, 북부는 형요백자 계통이 발달했듯 우리나라도 중부와 남부지역이 서로 다른 계통의 도자기를 생산했다.

전통 흙가마에 중국 청자기술 도입 

화원 청자가마의 생산 품종은 주력상품인 청자를 비롯해 흑자와 경질도기였다. 모두 동일한 가마에서 출토되고 있다. 다만 경질도기는 극소량 생산됐다. 
이곳에선 백자를 주로 생산한 중부지역 고려 초기 가마와는 달리 백자는 생산되지 않았다. 
화원의 초기청자 가마는 두 그룹으로 나뉜다. 
1그룹은 4곳으로 둥글넙적한 중국식 찻잔을 비롯해 내저곡면의 발, 접시, 종지기 등을 생산했다. 2그룹은 62곳으로 음식용기의 내저에 굴곡진 원의 흔적이나 선각의 원이 나타난다.
 이러한 흔적은 처음에는 중국 월주와 같이 내저를 곡면으로 생산하다가 포개어 구울 때 규격화가 필요해 반달모양의 나무 도구인 근개를 사용한 흔적이다. 
따라서 전자의 1그룹이Ⅰ단계 중국식이고, 2그룹은 Ⅱ단계인 한국식으로 운영됐음을 알 수 있다.
제조기술을 보면, 중국적 요소와 전통적인 요소로 양분된다. 중국적 요소는 청자에서 나타나며, 소형음식기인 완, 발, 접시류, 잔, 뚜겅 등이다. 
전통적인 요소는 흑자와 도기로 만든 저장용기에서 주로 나타나며 광구형 편병, 나팔형 편호, 주판알형 기름병 등이다. 
굽는 법에서 중국적 요소는 부드러운 백색내화토, 갑발, 갑발받침 등이고, 전통적인 요소는 흙가마, 내화토로 조개껍질 사용 등이 그것이다. 전통적 요소의 유래는 영암구림도기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화원의 초기청자 요지에는 영암의 구림도기의 전통적인 기술을 바탕으로  중국의 청자 기술이 유입돼 운영됐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화원, 무늬없는 청자시대 열다

화원면 청자요지에서는 3가지 품종 즉, 청자, 흑자, 도기가 동일가마에서 생산됐다. 청자의 경우는 소형 음식용기 즉 찻잔, 발, 종지기, 접시류, 잔탁, 합, 뚜겅 등이다. 
중형의 저장용기인 병(甁)과 소호, 호(壺: 항아리)는 청자와 흑자로 생산됐는데, 파편으로 보아 청자로는 1~2할 정도 생산했다. 특이한 것은 화원청자는 아무런 문양이 없는 대신 화형접시(꽃모양접시)와 발(鉢)에서 보이는 수직누름 기법을 사용했다. 
화원면 초기청자는 단순한 기종, 제조기술 등이 중국과 매우 흡사해 중국 남쪽 절강성의 월주요에서 선택적으로 전래 된 듯하다. 참고로 월주요에서는 당(唐)대에 무문(無紋)을 주로 생산하다가 오대시기(907~979년)가 되면 음각문 등이 등장하고 발달했다. 
이런 월주요 청자를 1123년 서긍은『고려도경』에서 고비색(古秘色)청자라 하면서 “고려청자들이 중국의 그릇 만드는 규정과 법식을 모방해 별도 그림으로는 그리지 않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