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돌봄에 대한 논의 필요한 때

2020-07-31     김성훈/청년작가
김성훈 청년작가

 코로나19로 인해, ‘질병’이라는 화두는 우리 삶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다. 
삶의 층위와 결은 제각각이겠지만 질병, 나이 듦, 돌봄은 포스트 코로나 이후 중요한 화제가 될 것은 분명해졌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 나이 들어가는 지인을 본다는 것 그리고 생로에서 아플 수밖에 없는데 덜 아파하는 방법 중에 좀 더 쉽게 아프고 늙을 수 있는 사회를 상상하는 것, 그것이 구체화 되는 것이 복지이지 않을까.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라는 책을 접했다. 새벽 세시라는 시간 설정은, 우리 몸이 병들었을 때 그 통증을 가장 날카롭게 감각하는 시간을 상징한다. 아프다는 감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다. 격렬하게 지각되는 몸의 촉에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자아의 시간이 온다. 그때, 병자는 비로소 생의 동행자에게 진지한 말 걸기를 시도한다. 
“심신의 이동과 변화를 가져오는 이 모든 사건의 한가운데에는 몸으로 존재하는 나와 내가 만나게 되는 누군가가 있다. 병상에서 읽는 책일 수도, 치료를 담당하는 의료진일 수도, 돌봄제공자일 수도 있는 이 누군가의 경험은 변화하는 나의 경험과 필연적인 동반자 관계를 이루며 각각의, 그리고 또 통합된 하나의 이야기를 짜나간다.” 
여섯 편의 글이 인도하는 길을 맹인 문고리 잡듯 읽다 보면, 역설적으로 내가 사는 세계의 젊음을 보다 선명하게 보게 된다. 아픔이라는 사전적 단어는 머리로 알고 있지만 아직은 몸이 인지하지 못하는 그 젊음. 모든 것이 자유롭고, 모든 것이 활달하고, 또 한걸음 내치고 쉬는 노인과 달리 한 몸 속 두 개의 심장이 뛰는 것마냥 빨리 달려나가는 ‘어리다’는 형용사가 보인다.
공동체라는 말, 돌봄이라는 말, 그것이 사회에 드러나 작동하기 위해선 ‘어린’이 결코 추상화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아픔에는 늙은 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젊은 몸 역시 아픔을 끼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 글의 논지는 상대적이다. 이웃에게 돌봄을 기대하는 것은 이기적이지 않다. 서로가 서로를 돌봐주는 사회, 행정과 정치는 그에 맞춰 보행하는 관계가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 속에서, 그 누구도 ‘희생’을 강요할 수도, 강요 당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그 후에는 무엇을과 어떻게가 ‘늙다’는 동사에 질문을 한다. 
늙음은 개인적이고 가정사적인 일이지만 그것을 한꺼풀 층을 두텁게 해 ‘고령화 사회’라고 한다면 이것은 더 이상 개인사적인 일이 될 수 없다. 
원주민이 원숭이를 손쉽게 사냥하는 방법이 하나 있다. 주먹만 들어가는 유리병에 바나나를 비롯한 먹을 것을 넣어두는 것이다. 원숭이는 손으로 먹거리를 쥐고 손을 빼려고 한다. 결과적으로 손이 빠질 리가 없다. 손만 놓으면 원주민 사냥꾼에게 쉽게 도망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착이 그들을 원주민 식탁에 요리재료로 만들었다. 한발씩의 양보는 그래서 필요하다. 
돌보고, 돌봄을 받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질문을 해야 한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면서 살아 있음에 대한 깊고 통렬한 질문이어야 한다. 사회적 통계치도 아니고, 기능주의 정책 리스트도 분명 아니다. 지역주민에게 돌아가자. 나이 듦에 대해, 살아감에 대해, ‘돌봄 위기’라는 주제 아래, 지역적 해법을 모색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