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위한 종자, ‘작은 우주’이자 무형의 가치
정원에는 다양한 꽃이 피고 꽃의 결과물인 열매 역시 모양과 색, 질감, 크기, 향과 맛까지 제각각인데 열매의 풍성함과 멋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온통 꽃에만 정신이 팔리기에 꽃이 진 뒤에는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을 품고 있는 열매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고 어린 열매의 매력이 무궁무진함을 알 수 있다.
‘농사꾼은 굶어 죽으면서도 다음해 뿌릴 종자는 베고 죽는다’는 속담이 있다. 속담처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러시아 모스크바를 포위했을 때, 종자연구소 연구원들이 굶어 죽으면서도 종자에는 손 하나 대지 않았다고 한다.
대부분의 식물은 씨앗이 익어가는 신호를 보낸다. 열매는 후각보다는 시각에 의존하는 상대를 위해 초록 잎 숲 사이로 붉은색(호랑가시나무, 낙상홍, 피라칸타, 산딸나무 등)으로 익어간다. 상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다. 이에 멧비둘기, 직박구리, 까치, 동박새, 딱새 등이 열매에 다가온다. 열매는 껍질에 발아억제물질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새를 비롯한 동물들의 소화기관을 통과하면서 껍질은 제거되고 배설물과 함께 씨앗이 땅에 떨어져 발아가 된다. 이것은 식물과 동물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공진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따라서 씨앗을 껍질이 있는 째로 파종하면 대부분 싹이 나지 않는다.
열매는 색뿐 아니라 자신을 둥글게 만든다. 이유는 땅에서 잘 굴러가기 위함이다. 또 달콤한 향기로 각종 동물들을 유혹해 더 멀리까지 종자를 번식하는 현명함을 가지고 있다.
인류가 풀어야 할 과제 중 가장 복잡하고 그러나 해결해야 할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 감소’는 인간이 불러온 재앙이다. 이에 국제사회는 기후협약이나 생물다양성협약 등을 통해 생물다양성 보전에 노력하고 있다. 이를 위한 시드볼트(Seed Vault)가 전 세계적으로 두 곳이 있다.
시드볼트는 ‘시드(Seed-종자)’와 ‘볼트(Vault-금고)’가 결합한 단어로 ‘종자를 저장한다는 측면에서 Seed Bank(종자은행)와 비슷하지만 지구와 인류사회에 기여하는 차원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시드뱅크(종자은행)는 연구나 증식을 위해 중ㆍ단기적으로 저장하는 시설이지만 시드볼트는 기후변화나 전쟁, 핵폭발 등 예상치 못한 지구 차원의 대재앙에 대비해 야생식물의 멸종을 막는 초인류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종자의 보관 기간은 영구적이라고 할 수 있다. 노르웨이 북쪽 섬에 설립한 스발바르글로벌시드볼트는 사람들이 재배하는 작물 종자를 전 세계 약 110만 점을 보관하며, 다른 하나인 ‘백두대간 글로벌시드볼트’에는 국내외 50여 개 기관으로부터 약 5만5,000점의 야생식물 종자를 수탁 받아 보관하고 있다. 야생식물은 말 그대로 야생에서 자라는 식물이기 때문에 작물보다 유전자풀이 다양해 환경적응력이 우수하다. 최근에는 야생식물에서 다양한 기능성 물질이 발견되면서 의약품 등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쓰임새도 다양한 열매는 오디, 버찌, 앵두, 살구, 자두, 복숭아, 밤처럼 식용으로도 쓰이지만, 동백나무, 산초나무, 비자나무, 옻나무 등의 열매는 기름을 만들고, 치자나무, 고욤나무, 굴피나무, 노린재나무 등은 열매를 염료로 사용한다. 사람을 보호하고 기쁘게 해주는 약품과 화장품 원료가 되는 헛개나무, 모과나무, 느릅나무, 오미자, 마가목, 백당나무 등의 열매이다.
인류의 미래를 위한 종자는 단순히 경제적 논리로만 계산할 수 없는 ‘농업의 반도체’, 혹은 ‘작은 우주’라 불리는 무형의 가치이다. 이제 우리는 식물과 씨앗을 대할 때 꽃으로만 보지 말고 그 생명의 존귀함과 가치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