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 ‘복원’ ‘재생’ 단어 사용 신중하자

2020-09-07     김성훈/청년 작가
김성훈/청년 작가

 가슴을 턱턱 막히게 하는 단어가 있다. ‘파괴’, ‘복원’, ‘재생’이라는 단어가 그렇다. 주로 이들 용어는 지역사회의 한 축인 농어촌마을개발과 관련해 자주 사용한다. 마을공동체가 파괴됐다고 말한다. 
향약과 두레가 있던 옛 시절 마을의 정담이 사라지고 있기에 이때의 전통적 가치를 복원하자고 주장한다. 포스트 코로나, 4차 산업혁명 시기에 맞추어 노후화 등으로 쇠퇴된 도심환경을 정비하고 시설을 개보수해 지역주민에게 쾌적한 삶의 환경을 제공하자는 취지에서 ‘재생’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여기에,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한다. 공동체가 파괴됐다고 말한다. 그 이유로 산업화 시대를 맞이해 농어촌 인구가 도시로 이주한 것을 꼽기도 한다. 그, ‘파괴’라 말하는 관점은 누구의 시선이 닿은 것일까. 공동체가 파괴됐다면, 그 속에 무엇이 파괴됐는가. ‘복원’이라는 것은 향수를 상징하는 옛 정서로의 회귀를 말하는가. ‘재생’이라는 것의 사전적 정의는 낡거나 못 쓰게 된 물건을 가공해 다시 쓰게 함인데, 낡다라는 관념에는 노후화된 시설만을 뜻하는 것인가. 아니면 쾌적하지 못했던 지난한 삶을 포괄하는 의미인가. 그 불편함을 호소한 사람은 누구인가. 지역주민인가, 행정가인가, 정치가인가. 마지막 질문을 하겠다. 대체 공동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명확하게 잡히지 않는 상상의 산물, 공동체, 그들이 지향한다는 유토피아, 유토피아는 있으면서 없는 완전한 실체가 없는 것. 모두가 완벽하다고 믿는 신세계, 그 속에서 잘삶이란 과연 무엇일까. 
머릿속에는 조지오웰의「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멋진 신세계」의 디스토피아적인 풍경이 떠나지 않는다. 언어 프레임이 일단 생성되면 사람은 그 언어가 내포한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에서 오류가 발생한다. ‘파괴’, ‘복원’, ‘재생’이라는 무서운 용어 속에서, 나는 왜 그 옛날 서구사회의 원주민과 백인 정복자들의 싸움이 생각나는 것일까.
“저들은 미개하다. 문명인인 우리가 한 수 가르쳐 줘야 한다.” 이러한 발언의 맥락은 일제 강점기의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했던 말과 같다. 이성무 한국역사문화 연구원장이 쓴「조선시대 당쟁사」를 보면, 일본인 그들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한국인은 단결력이 부족하고 마치 모래와 같으며, 당파 싸움으로 결국 망국의 길을 갔다는 식의 주장을 했다고 밝혔다. 
‘파괴’, ‘복원’, ‘재생’의 시선에서 바라본 토착민의 삶은 어떠할까. 그들은 개화·혁신에서, 수동적 대상일 뿐이었다. 그들 삶의 주체를 판단할, 그들 삶을 영위할 능력이 없다는 가정이 들어선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새마을 운동의 일환이었던 지붕개량 사업으로 인해, 우리의 농어촌이 맑고 깨끗해졌고, 문명화됐다고 말할 수 있었던가. 빛은 밝음을 부르는 것이 아니고 빚을 불렀다. 결국 신경림 시인의 농무처럼,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라는 말이 지금도 나올 수밖에 없다.
‘파괴’, ‘복원’, ‘재생’의 키워드를 꺼내서 지역에 사는 사람을 부르는 것은 조금 더 신중해지자.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듯 마을마다 가지고 있는 색이 다르다. 그것을 일괄적으로 빨간색 파란색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는 것은, 오히려 공동체를 파괴하지 말자면서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고, 있는 가치를 없애고, 없는 가치를 복원(?)하는 것이며, 정신적·물질적 유산을 낡음으로 치부해 쓸모 없음으로 만드는 재생(?)과 같다. 
마을 어른들께서 말씀하신다. “애들 다 도회지로 떠났는디, 나 죽으면 끝인 시상, 뭣한디 성가시게 해쌀까 모르것네.” 
지금 중요한 것은 ‘파괴’, ‘복원’, ‘재생’이 아니다. 자식을 도회지로 떠나보내야 했던 부모의 마음 그리고 이 말을 하는 어르신들의 성가셔 하는 마음, 이것을 마을 사람들의 언어로 읽어야 한다. 그들에게 ‘파괴’, ‘복원’, ‘재생’의 세계로 오세요 하는 것이 아닌, 지역 활성화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성가셔 하는 마음’으로 천연덕스럽게 걸어 들어갈 시선을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