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보면 찬란한 해남 고대역사가 보인다

2021-02-01     변남주(국민대 교수)
변남주(국민대 교수)

 

 해남은 백두대간과 태평양이 만나는 접점에 위치한다.
 이러한 공간 인식을 전제(前提)로 하자. 그래야만 해남의 역사 문화를 바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수십 년 동안 봐왔던 우리 나라 지도를 거꾸로 뒤집어 보자.
 그러면 백두대간의 남단 해남을 중심축으로 해 태평양으로 뻗어나가는 역사관이 생길 것이다. 조선시대 이후 한양은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래서인지 해남을 비롯한 남부지역에서 서울(한양)로 갈 때 관습적으로 써온 말이 상경(上京)이라는 말이다.
 이 관습은 어디에서 비롯됏을까?
 우리는 지도를 보통 벽에 걸어 놓고 본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북쪽에 있는 서울이 위고 남쪽에 있는 해남은 아래로 인식된다.
 필자는 바다에 대한 이런저런 공부를 하면서 이 표현이 타당한가에 대한 강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다 공간 적으로 서울이 위〔上〕이고 해남은 아래〔下〕라는 기왕의 인식은 잘못임을 깨달았다.
만약에 서울이 위라면, 인천에 바닷물이 만조가 되면 해남은 해저 약 350㎞에 위치하는 바닷속이 돼야 하나 그렇지 않다. 진실한 위(上)는 하늘로 향할 때 ‘올라간다’라고 해야 옳다.
 예컨대, 두륜산이나 한라산 정상을 등산할 때 ‘올라간다’라 해야 맞다. 서울행의 경우는 수직이 아니라 수평운동인 것이다.
 지도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바닥에 놓고 봐야 한다. 이때 세상을 바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필자는 서울이 해남과 동등한 평지에 있다는 것을 깨닫자 비로소 막혔던 해남의 역사가 한 순간에 밀려오기 시작했다.
 해남의 역사문화는 국제성과 해양성이 강하다. 시대적으로는 고대로 갈수록 주체성, 중추성, 차별성이 강하고 고려시대 이후 현재로 가까워지면서 종속성, 변방성, 유사성이 강한 경향이 있다.
 청동기시대의 700여 고인돌, 백포만 일대의 패총들은 국내 최대 규모이며, 당시 전기 대형 옹관고분들은 마한(철기)시대를 주름 잡았던 해양 폴리스 국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런 백포만을 유럽에 견줘보면 고대 그리스 해양문화의 발상지인 에게해와 유사하다.
 에게 해는 그리스와 터키 사이의 지중해로 동양의 고대문명을 서양으로 전파하는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유럽문화의 발상지로 발전했다.
 백포만도 그러했다. 중국의 철기문화를 일본으로 전달하면서 발전한 곳이다. 백포만이 가장 찬란했던 시기는 진시황 무렵부터 시작해 4세기 무렵까지이다.
 일본의 각처 연안에서 발견되는 점뼈, 화천(청동 화폐), 쌀농사, 철기 등의 유사함이 그 증거이다.
 또 대형 옹관고분들도 마찬가지인데, 세계에서 두 곳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남을 비롯한 서남해안 일대와 일본에서는 큐슈지역 북부에서만 발견되어 주목이 된다.
 그 중 해남은 해남반도에서만 확인되며 백포만을 중심으로 높은 밀도를 보이고 있다.
 이어 5세기 이후에 등장하는 백 수십 기 고분들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고대 출토유물들은 왜(일본)계나 가야계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반면 백제계는 찾아보기 어렵다. 고대시기 해남반도에 등장하는 왜계 문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일본 고대문화는 모두 우리나라에서 건너 간것으로 배웠다.
 그러나 실제 문화는 서로 다른 문화가 교류를 통해 발전하는 것이지 일방적으로 주거나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해남 역사는 바다와 육지의 접점에서 교류하며 발달했다. 미래 성장동력으로 가꾸려면 먼저 문화관이 바뀌어야 한다.
 이때 비로소 해남 문화의 참가치가 드러날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