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원이 된 군민문화, 황산옥매광산을 다녀오다
군민 1만원의 성금이 만들어 낸 추모비는 기적이었다. 맥이 끊길 수 없는 스토리를 우리는 역사라 부른다.
필자는 2018년 추모제를 통해 처음 황산옥매광산을 알았다. 돌이켜보건대 3년 전인 2018년 8월6일 오전의 하늘은 물을 머금고 있었다. 당시 박철희 유족회장과 박판수 추모조형물 건립 공동위원장의 주도 아래 천막이 펼쳐졌다.
자갈을 깔아 놓은 땅에 천막 지지대를 박고 줄로 가닥가닥 엮어 대형천막의 무게 중심을 잡았다. 접이식 테이블이 펼쳐지고, 추모제를 치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사람들 간 인사 소리, 발이 떼어지고 다시 땅에 닿는 무게를 자갈을 저들끼리 구르고 할퀴면서 알았다. 어쩌면 살아 돌아온 광부가 돌아오지 못한 광부들을 위해 추모조형물을 건립해 달라는 말을 꺼내기까지 우리도 자갈처럼 살았는지 모르겠다. 생채기를 낸 세월 동안 사람들 가슴에는 열매가 익어가고 있었다. 가팔랐고, 못생겼고, 구부정하게 생겼다. 열매가 툭툭 땅에 떨어졌다.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이 손을 잡고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것은 아픔을 몸에 녹인 사람들이 더 큰 삶으로 살아가기 위해 터득한 지혜였다.
가슴속 통증이 매설된 유족과 마을 사람들은 단단했다. 손 마디마다 올록볼록하게 박힌 굳은살은 여정의 필모그래피였다. 배곯아 뱃심도 없는 양반들을 차디찬 바다에 던져두고…
유가족들이 했던 말이었다. 다시 찾은 황산옥매광산이었다. 3년 전 추모제 사회를 진행하며 느꼈던 감정들이 오롯이 되살아는 듯했다.
바닥은 매끄럽게 포장이 되어 있었다. 그 길 위로 버스 두 대가 정차했다. 대학생 서포즈단을 태운 군 버스였다. 해설가가 먼저 내리고 그 뒤로 학생들이 포장된 길을 밟았다.
해설가는 학생들에게 옥매광산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옥매광산’이라 불리는 옥매산은 일제강점기 일본이 본격적으로 개발을 시작했다. 군수물자 생산에 필요한 알루미늄 제련의 원료로 쓰이는 명반석이 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주로 국책사업으로 이뤄졌다.
일본은 당시에 옥매산 개발을 위해 강제동원한 조선인을 사전 예고 없이 강제로 제주도로 끌고 갔다. 1945년 3월 경 미국 본토 공격이 임박하면서, 옥매광산에 강제동원된 조선인을 제주도로 2차 동원한 것이다. 이들은 주로 지금의 제주 모슬포 부근인 삼방산에서 해안동굴이나 방어진지를 파는데 동원됐다. 주로 밤 시간대였다. 발파기술이나 굴착 경험이 군사전략에 유용하게 이용된 셈이었다. 강제동원은 비극적 집단 사망사건으로 이어졌다.
1945년 해방을 맞자 강제징집된 조선인들은 배를 구해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오려고 했다. 당시 225명을 태운 배는 제주 추자도 앞바다에서 원인 모를 화제로 침몰했다. 그때 118명이 수몰된 것이다.”」
해남군민이 만든 추모조형물은 해남군이 관리하고 있고 이제 그것이 살아있는 지역 역사 교재가 됐다. 대학생들이 옮겨 놓은 시야 뒤로, 이 공간은 공원으로 조성될 것이다. 가까운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다. 이미 있는 스토리에 현재의 이야기가 덧입혀질 공간이었다.
어떤 맥락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 지역에 하나 더 조성된 것이다. 그곳의 발원에 지역 군민이 있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공간은 더 확장될 것이고 진화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