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청년들과 생각하고픈 말
현대 호러 문학의 거장 리처드 매시슨의 ‘죄수’(The Prisoner)를 읽었다. 필립 존슨은 볼에 닿는 꺼끌꺼끌한 담요가 느껴져 잠에서 깼다. 정적이 흐르는 그곳은 사형수를 수감한 감옥이었다. 교도관은 존슨에게 존 라일리라 호칭하며, 앞으로 사형이 되기까지 두 시간이 남았다고 말했다.
자신은 존 라일리라는 사람이 아니며 핵물리학자인 필립 존슨이라고 말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교도관은 그에게 신부를 보내줬다. 신부는 존 라일리라는 사람은 물건을 훔쳤고 사람도 죽였다고 그에게 알려줬다. 도저히 자신을 증명할 방법이라고는 없었다. 딱 하나 있다면 핵 물리학을 연구하면서 폭발이 있었는데, 그때 다친 자국으로 남은 섬광 화상뿐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신부는 물론 교도관들은 믿지 않았다.
폭발 사고가 일어났던 때와 교도소에 수감됐을 때의 시간의 차는 10년이었다. 필립 존슨은 10년 전의 기억을 바탕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했고, 교도관은 현재의 시간관으로 존 라일리를 보고 있었다. 교도관은 그동안 수많은 사형수를 상대하면서 별의별 사람들을 다 봤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표현했고, 자신의 몸에 폭탄이 설치돼 있어서 전기의자에 앉으면 교도소가 폭발할 것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필립 존슨의 주장도 그런 맥락에서 읽힐 따름이었다.
소설은 ‘그저 그런 일상’의 한 폭과 사형수라는 믿지 못할 사실에 빠진 한 인물의 ‘공포’를 무덤덤하게 표현했다. 공포의 속성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외면적으로 흔들리는 동공, 맥이 빠지는 움직임이 있다면 내면적으로는 허탈해하는 감정, 죽음과 맞닿을 정도로 직면하는 스트레스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일상이 무너져 내려도, 다른 한쪽에서는 그런 것조차 평범한 일상의 나날이라는 것 자체가 공포일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의 소재는 영화 ‘박하사탕’에서도 나온다, 형사로 재직하던 영호의 청년 시절, 학생 운동권에 속한 명식을 고문할 때, 죄의식 없음으로 드러나는 그의 직업인의 생활 모습에서 관객은 공포를 느꼈다. 마찬가지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으면서, 유태인을 집단 매장한 아이히만의 직업의식(?)을 보며, 공포를 느꼈다.
일상이 흐트러지는 것,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겪는 것, 앞으로의 삶을 예상할 수 없는 것이 공포라고 정의해본다면, 감염병의 시대인 지금처럼 공포가 우리 앞에 서 있을 때가 또 있었을까. 한쪽에서는 사형수의 입장에서 ‘희망이 없어’를 이야기하고, 다른 쪽에서는 ‘카드놀이를 하기 위해’ 형광등이 켜지기만을 바라고 있다. 우리는 각각 어떤 은유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사형 시간 두 시간 남짓, 죄수의 머리를 깎는 이발 기계음 소리가 수감 건물에서 서서히 증폭한다. 공포는 웃자란 가지처럼 누군가의 마음을 깨뜨릴 것이다. 그 전에 존 라일리임을 증명해야만, 살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기 자신을 증명해야 할까.
존 라일리가 소설 속에서 그토록 아내를 찾는 이유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줄 수 있는 한 가닥의 희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관계를 뜻한다. 사람은 결국 가까운 관계 속에서 자신을 증명할 수 있다. 그 말인즉, 친밀한 관계는 공포를 물러서게 한다는 뜻이다. 지역에서 웅크리고 있는 청년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