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황산면 삼지원 - 또 하나의 명량해전, 삼별초와 여몽연합군
여몽연합군
황산 삼지원에 주둔
1597년 서해로 진출하려던 일본수군을 막아낸 명량해전, 1270년 삼별초와 여몽연합군의 치열한 해전도 명량에서 일어났다.
고려정부가 몽골에 항복해 개경으로의 환도(還都)를 천명하자 이에 반발한 삼별초는 봉기를 일으키고 남쪽의 섬을 경략하며 진도에 입거했다. 또 서남해안 섬과 바다를 장악하며 고려정부의 조운로를 막았고 지방관들은 삼별초에 조공까지 바치는 등 고려정부의 제정과 정통성을 위협했다. 여기에 삼별초는 일본과 연대를 시도하며 경남에 있던 몽골의 둔전지까지 공격하는 등 몽골의 일본정벌 정책도 위협했다. 이에 고려정부는 김방경과 몽골의 원수 아해를 필두로 여몽연합군을 결성, 황산면 삼지원을 진도 공격기지로 삼고 진도 벽파진의 삼별초와 대치한다.
여몽연합군과 삼별초
‘명량해로’ 놓고 전투
삼별초군은 훈련이 잘된 고려 최고의 특수부대였다.
여몽연합군이 삼지원에 기지를 틀자 삼별초군은 괴수의 그림이 그려진 수 많은 군함을 배치하며 먼저 기세를 잡는다. 그리고 일어난 1차 해전은 준비된 삼별초군과 수군이 미약한 여몽연합군의 공방전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김방경과 아해의 갈등이 일어나 아해는 고려정부 대표인 김방경을 체포해 개경으로 압송하는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2차 해전은 다시 황산 삼지원으로 내려온 김방경에 의해 준비되고 시작됐다. 하지만 시작단계에서 다시 삐걱거렸다. 초원 출신인 몽골의 아해가 해전에 소극적으로 임한 것이다.
이에 분개한 김방경은 홀로 벽파진을 공격하지만 삼별초군에 포위돼 생사의 갈림길에 선다. 이때 양동무 장군의 활약으로 겨우 목숨은 건지지만 피해는 막심했다.
해전에서 빈번히 패하자 고려정부와 몽골은 각각 박천주와 두원외라는 사신을 삼별초군에 보냈다. 이에 삼별초군은 박천주는 환대하고 두원외는 억류하는 이간책을 꾀한다.
3차 해전은 우연찮게 발생했는데 환대를 받은 박천주가 술과 흥에 취해 잔치를 벌이던 중 삼별초군이 사신선단을 급습한 것이다. 이때 사신선단을 호송하던 여몽연합군은 전멸의 위기에 처하지만 나주사록 김응덕의 분전으로 겨우 전멸만은 모면했다. 3차 해전을 계기로 여몽연합군엔 큰 변화가 생겼다. 바로 해전에 무능했던 아해 대신 흔도로 몽골의 지도부가 교체된 것이다.
4차 해전은 바뀐 원수인 흔도가 작전을 짰다. 앞선 전투가 하나의 길로만 공격하니 노련한 삼별초 수군을 이길 수가 없었다고 판단한 흔도는 세 갈래의 공격안을 고안했다.
삼지원의 넓은 만과 시야성을 이용해 한 방향으로 가다 중간에서 세 갈래로 나뉘는 삼선 공격이었다. 거듭된 승리로 자만하고 있던 삼별초는 바뀐 전략을 막지 못하고 무너지고 만다.
왜 삼지원 선택했나?
여몽연합군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황산 삼지원, 여몽연합군이 그곳에 기지를 튼 가장 큰 이유는 도해(渡海)의 기능이었다.
해남에서 진도로 들어가기 위해선 삼지원을 거쳐야만 했다. 마찬가지로 진도에서 육지로 들어오기 위한 길목도 삼지원이었다.
따라서 내륙으로 진출하려는 삼별초를 막기 위해선 삼지원의 도해로의 기능이 꼭 필요했다.
이 도해로의 기능은 진도대교가 착공되기 전까지 이어졌다.
삼지원은 남해에서 서해로 진입하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가야 했다. 명량해전 당시에도 이순신이 서해를 통해 북상하려는 왜군을 막기 위해 벽파진과 명량해협에서 진을 친 이유도 마찬가지다.
삼지원의 가치와 현황
삼지원은 삼별초와 해전을 벌인 여몽연합군이 8개월간 머물렀다는 의미만으로도 중세사 문화재이다. 전 세계를 아우르는 초강대국인 몽골의 군대와 고려가 연합군을 결성해 삼별초와 해전을 벌인 이곳은 어쩌면 이순신의 명량해전과 버금가는 역사성을 지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삼지원은 진도대교 착공 후 나루의 기능을 상실해 방치돼 있다. 이를 어찌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