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 신미제국(침미다례)의 도읍지 ‘신미달’은 해남반도
마한문화권을 포함한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이 작년 5월2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다음 정부에서 본격 추진되는데, 첫 단추는 가칭 ‘마한역사문화센터’ 사업이며, 해남군은 유력한 후보지 중의 하나이다.
그 이유를 마한역사를 목지국과 신미제국(침미다례) 시기로 나눠 살펴보자. 마한이 목지국이 중심이었던 시기의 영역은 경기, 충청, 전라도이다.
중국의『후한서』,『삼국지』등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194년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기씨조선의 준왕(準王)은 연나라의 망명객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와 스스로 한왕(韓王)을 칭했다. 따라서 준왕은 기씨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목지국의 건국시조인 셈이다. 그 도읍지는 익산설이 유력하다. 목지국 마한 왕은 삼한 중 가장 강성해 진왕(辰王)이라 했다. 그러나 강성했던 목지국과 주변 마한소국들은 백제에 편입되는데 그 한계선은 고사부리로 오늘날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이다. 이때 전라남도의 동부지역은 가야권에 편입됐으나 서부지역은 마한의 잔존세력으로 바로 신미제국이다.『진서(晉書)』의 장화(張華) 열전에서「동이마한신미제국(東夷馬韓新彌諸國)」의 20여국이 282년 9월 서진(西晉)에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해 조공을 보냈다고 했다. 일본서기에는 369년(신공황후 49) 3월에 이르러 “왜는 백제장군인 목라근자, 사사노궤 등 군사를 보내 가야 7국을 평정하고 군사를 서쪽으로 몰아 고해진(古奚津)에 이르고, 침미다례(忱彌多禮)를 무찔러〔屠〕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주었다. 반고(半古) 등 4소국은 스스로 항복하였다.” 고 적고 있다.
여기에서 침미다례는 해남반도로 보는 것이 유력설이며, 반고는 나주의 반남으로, 신미의 20여 소국 위치는 영산강 유역을 비롯한 전라남도 서부지역으로 보는 견해에 이견이 없다. 이 기록에 따르면 신미의 20여 소국 중 으뜸 도읍지는 ‘신미(=침미)달’이다.
참고로 다례(多禮)는 땅의 우리 옛말 ‘달’을 음차한 왜식 표기이다. 그 용례는 고조선의 도읍지인 아사달, 양달, 응달 등이 있다. 살펴본 바 신미제국은 기원전 2세기~4세기까지 약 600여 년 존재했다. 이 시기는 철기시대이다. 이러한 ‘신미달’이 해남반도에 위치했다는 고고학 증거는 차고 넘친다. 대표적인 송지면 군곡리 패총지는 우리나라 최대의 철기시대 즉, 마한유적이다. 이외에도 철기시대 패총은 두모리, 미야리, 어불도 등 백포만 일대 10여 곳에 산포한다. 또 주거지 및 옹관들은 현산면의 분토리에 이어 화산면의 안호·부길리 등에서 쏟아졌다.
이러한 유적에서는『삼국지』의 기록대로 금붙이나 마구(馬具)가 발견되지 않는 대신에 옥이 출토된다. 이처럼 마한시대 유적이 광범위하고 종합적으로 분포돼 있는 지역은 찾아보기 어렵다.
여기에다 현산면에서 최근 발견된 200여 고인돌에다 100여기의 집단 고분들은 마한시대 전후의 유적으로 덤이다. 이러한 해남반도의 고대문화를, 필자는 아시아 고대문명이 유럽으로 건너가다 꽃피운 그리스 문명의 발상지인 에게해에 비견한다. 그런데 ‘마한역사문화센터’ 후보지 선정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해남이 역사적으로는 으뜸이나, 결정적인 한방은 정치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이를 유념하고 군민의 관심제고, 지속적인 발굴 및 학술대회 개최, 민관정위원회 설립 등 철저히 준비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