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미다례 - 전쟁을 몰랐던 비운의 왕…이곳에서 최후를 맞다

2022-01-10     해남우리신문
송지면 군곡리에서 발굴된 침미다례 왕의 집터로 추정되는 주거지.  

 

송지면 군곡리 왕의 집터
마지막 왕, 궁터만 남기고

369년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강진을 넘어 자신의 영토인 침미다례(신미제국)로 파죽지세 몰려오고 있을 시간, 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의 앞에 백포만 항이 들어왔다. 중국과 일본, 가야와의 해상교류가 활발히 진행됐고 또 그 중심지였던 백포만이 한눈에 들어온 곳에 그의 궁터가 위치했다. 
전령이 또 한번 긴급한 상황을 전했다. 이미 삼산면 신금마을이 백제와 왜의 연합군에 의해 불에 타 버렸다고. 거리낌없이 침미다례 영토를 도륙해오는 군대, 그런데 침미다례 왕에겐 발달된 철제무기도 전쟁에 필수였던 훈련된 말도 없었다. 침미다례에 찾아온 두 번째 위기였다. 
첫 번째 위기는 백제 고이왕 13년(246) 백제가 마한 54개 소국의 맹주였던 목지국을 점령하고 한강유역의 실질적인 세력으로 자리잡을 때였다. 이때 침미다례 왕은 차령산맥 이남에 있던 나머지 20~29개 마한소국들을 긴급히 소집해 반백제연맹을 결성했다. 그리고 282년에 중국 진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다. 

백제‧왜 영토 침략

당시 침미다례는 백포만을 통한 국제해상무역으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엘도라도 같은 국가였다. 전쟁을 몰랐기에, 침략을 받아본 경험이 없었기에 타 나라와의 외교 경험도 없었다. 그러한 나라의 왕이 마한의 정통성은 백제가 아닌 침미다례라는 것을 주장하는 외교전에 나선 것이다.  
이때는 운이 좋았다. 마한소국들을 하나둘 점령하던 백제가 낙랑 및 대방군과의 전쟁 때문에 남쪽의 나머지 마한 소국을 점령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왕이 나라의 안녕을 위해 제를 지냈던 거석.

 

엘도라도 같았던 나라

이 시기 침미다례는 가장 번성기를 누렸다. 3~4세기 침미다례 수도였던 송지면 군곡리는 국제해상도시로 더욱 발전했고 침미다례 영토였던 삼산면과 화산면, 현산, 송지 등 해남반도에는 촌락들이 발달했다. 
또 백포만항에는 중국과 일본, 가야 등에서 오는 배들로 넘쳐났다. 배들이 들어올 때마다 철과 가야의 토기, 일본의 옥, 중국의 청동거울과 동전 등이 유입됐다. 또 1세기 경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가마기술로 토기의 대량생산도 가능했다. 백포만항으로 들어온 선진문명은 영산강을 통해 육지의 마한 소국들로 전파됐다. 
따라서 침미다례는 기원 후 2~3세기 한반도에 불어 닥친 기후의 한랭화로 농작물이 크게 피해를 입었을 때도 풍부한 해양자원과 해상중개무역으로 이를 극복했다.
침미다례 사람들은 조개를 정교하게 가공한 팔찌와 수정 및 옥구슬로 몸을 치장하고 사슴뿔로 정교하게 만든 머리빗을 사용했다. 철로 다양한 도구를 만들고 정교한 그릇을 구워 사용했다.
침미다례가 이러한 번성을 누리고 있을 때 백제에 근초고왕이 등극했다. 
근초고왕은 백포만의 국제해상무역로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백포만을 장악하면 서해와 남해로 이어지는 해상교역로를 장악할 수 있었고 영산강 뱃길도 수중에 넣을 수 있었다. 또 마한소국의 정신적 및 경제적 맹주인 침미다례를 굴복시켜야 나머지 소국들의 저항을 막을 수 있었다.    
369년, 백제와 왜 연합군의 마한소국들에 대한 침략이 시작됐다. 침략의 최종 목표는 당연히 침미다례였다. 침미다례에 닥친 두 번째 위기였다. 
강진을 통해 들어온 백제와 왜 연합군은 침미다례 영토를 너무도 쉽게 도륙해 버렸다. 백제가 승승장구하며 차령산맥 북쪽을 점령했던 1차 위기 이후에도 침미다례는 전쟁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았다. 침미다례 사람들에겐 전쟁, 침략 등에 대한 단어도 DNA자체도 없었던 것이다.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이 평화롭던 남미와 아프리카를 무차별적으로 쳐들어와 약탈했던 그 같은 일이 이곳에서 벌어진 것이다. 침미다례가 처참하게 도륙되자 영산강 유역과 전북 등에 걸쳐있던 마한소국들은 항복했다. 

 

8차 발굴이 진행 중인 군곡리 현장.

 

군곡리 정상에 위치한 궁터

백제와 왜 연합군이 침미다례 영토를 도륙하고 있던 시간, 침미다례 왕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죽음을 앞둔 그는 통곡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의 궁은 송지면 군곡리에서 가장 높은 지대, 백포만 항구가 훤히 내다보이는 곳에 위치했다. 그의 집 앞에는 나라의 안녕과 무궁함을 빌었던 거석이 놓여 있다.   
2020년 마한역사문화권 정비 특별법이 제정됐다.
또 전남도는 대선공약으로 1조9,750억 규모의 마한문화권 복원을 제시하고 있다. 내용은 마한역사문화촌 및 마한역사테마파크, 마한역사길 조성,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 건립 등이다.
그동안 마한역사 복원은 고분군이 분포된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진행돼 왔다. 
이와달리 8차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송지면 군곡리는 침미다례 왕이 거주했던 집터를 비롯해 당시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마을 전체가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호남에서 처음 발굴되는 마한의 생활사이자 마한의 마지막 제국 침미다례 왕의 집터가 발굴된 것이다.  해남군은 마한문화권 복원 사업 중 국립 마한역사문화센터 유치에 나설 채비이다. 송지면 군곡리 마한시대 생활사를 비롯해 현산면 읍호리에 분포된 100여기에 이른 고분군락지를 중심으로 충분히 유치가 가능하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백포항은 르네상스 진원지

바다가 교통의 중심이었던 시절, 백포항과 송지면 군곡리는 문명의 르네상스 진원지였다.
우리의 역사서에 이름 한 줄 남기지 않은채 사라진 비운의 나라 침미다례. 침미다례가 건설한 송지면 군곡리 해상도시가 마한역사문화권 정비 특별법을 통해 부활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침미다례는 전쟁이 아닌 평화를 바탕으로 번영을 누렸던 나라다. 평화의 기본은 인간 존엄성의 추구, 공동의 번영을 의미한다.   
따라서 침미다례의 복원은 평화를 추구했던 인간성 회복운동이자 인문을 중심으로 한 르네상스 운동이다.   
한편 <삼국지> 동이전에는 마한의 54개 소국 중 큰 것은 1만여 가(家), 작은 것은 수천 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규모가 큰 나라의 지배자는 ‘신지(臣智)’, 작은 것은 ‘읍차(邑借)’라 불렀다고 했다. 침미다례는 <삼국지> 동이전에서 빍힌 1만여 가(家)가 되는 큰 규모의 나라였다, 따라서 송지군곡리에 거주했던 침미다례 왕은 당시 ‘신지(臣智)’라 불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