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신미국 사람들, 유리옥으로 치장하다
2000년 전 송지 군곡리에 유리옥 공방 있었다
해상 실크로드 통해 유입
해남에 거주했던 마한사람들은 유리로 옥을 만들어 치장했다.
그렇다면 2000여년 전 1,000도가 넘는 온도로 가공한 유리옥의 제조기술과 그 원료를 어디에서 얻었을까.
중국 한나라 제7대 황제에 즉위한 한무제(기원전 141~기원전 87년)는 중국 역사상 두 번째로 넓은 영토를 확보해 한나라의 전성기를 열었던 인물이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과 당나라 태종·명나라 영락제·청나라 강희제와 함께 가장 위대한 황제로 꼽히는 그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요동지역에 낙랑을 비롯한 한사군을 설치한다.
특히 그는 육지 실크로드에 이어 해상 실크로드를 열어 동서양을 하나의 경제 네트워크로 구축시킨다. 그가 연 해상 실크로드로 인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중국, 한반도, 일본을 연결하는 바닷길이 열리고 이 바닷길을 통해 가장 활발히 유통된 것이 유리였다. 그런데 그가 고조선에 설치한 한사군으로 인해 경기도와 충청, 호남에 분포돼 있던 마한도 해상 실크로드에 적극 뛰어드는데 해남반도에 자리한 신미국(침미다례)도 해상 실크로드에 합류한다.
고도의 열관리 기술 습득
인류는 선사시대부터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해남에 거주했던 선사시대 사람들도 동물의 뼈와 조개껍질을 가공해 몸을 치장했다. 그런데 해상 실크로드가 열리면서 유리옥이 유입됐다. 다양한 형태와 빛깔, 그들은 변하지 않는 아름다운 물질에 넋을 놓았다.
유리는 4000~5000년 전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첫 출현했다. 이곳에서 출현한 유리제품은 로마제국의 팽창과 제국의 교역망을 통해 각지로 수출됐고 동지중해 연안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며 꽃을 피웠다. 그리고 중국 한나라 무제에 의해 열린 해상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과 한반도, 일본으로 퍼져나갔다.
바다 실크로드를 통해 유입된 유리옥은 희소성 때문에 권력의 상징물로 여겨졌다. 제사장을 비롯한 엘리트 집단의 권위와 신성함을 나타내는 기물로 사용된 것이다. 그런데 완성된 유리옥을 구매하는 것은 가격이 비싸고 높아지는 국내 수요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신미국 지배층은 직접 유리옥을 생산하고 싶었다.
그러나 유리옥을 제작하려면 1,000~1,500도의 고온이 필요했다. 고도의 전문적인 열관리 기술이 필요했던 것이다.
철 제작기술과 함께 유입
현산면 백포만을 통해 활발한 해상활동을 펼쳤던 신미국은 중국으로부터 일찌감치 노천 흙가마 기술을 도입했다. 이들은 송지면 군곡리에 노천 흙가마를 조성해 토기를 자체 생산했는데 가마온도는 1,000도를 넘지 못했다. 그러나 유리옥을 제작하려면 1,300도가 넘는 열관리 기술이 필요했다.
이러한 때 낙랑군으로부터 철기 제작기술이 군곡리로 유입됐다. 흙가마를 통해 열관리 기술을 익힌 신미국 장인들은 제철 기술의 유입으로 더 높은 열을 관리할 수 있게된 것이다.
유리옥이 출토되고 있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고대 유적지에선 제철 유적도 함께 발견되고 있다. 제철 기술과 유리옥 제작기술이 함께 유입돼 발전한 것이다. 송지면 군곡리에도 자체 철을 제조한 흔적이 남아 있다.
유리옥을 제작할 수 있는 열관리 기술을 습득한 신미국 사람들은 옥의 대량 생산을 위해 거푸집을 만들었다. 송지면 군곡리에서 출토된 유리옥 거푸집은 양질의 고운 태도로 제작됐으며 소성 온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송지면 군곡리에 철기 제작소와 함께 유리옥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사람과 공방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공방 통해 옥 대량 생산
신미국 사람들은 처음엔 동물뼈와 조개껍질로 팔찌와 목걸이를 만들어 썼고 광물에서 얻은 옥을 다듬어 장신구로 사용했다. 그런데 거푸집을 통해 유리옥의 대량 생산길이 열리게 됐다. 광물을 손으로 일일이 다듬어 만들었던 옥제품이 유리 거푸집으로 귀걸이와 목걸이 등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리 원재료는 여전히 수입에 의존했다. 유리는 규사·탄산석회 등의 원료를 냉각해 얻은 고체인데 그러한 기술이 아직 발달돼 있지 않은데다 그러한 물질을 채석한 흔적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리옥을 만들 재료는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수입한 반면 수입한 유리 원료로 대량의 유리옥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리옥 거푸집은 기원 전후 송지면 군곡리뿐 아니라 우리나라 여러 철기시대 유적지에서 확인되고 있어 당시 유리옥이 한반도에서 대량으로 생산됐음을 알려준다.
특히 송지면 군곡리에서 출토된 유리옥과 유리 거푸집은 중국계통인 납-바륨유리와 로마계통인 소다유리로 원료의 수입이 중국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유입됐음을 엿볼 수 있다.
신비의 굽은 옥도 생산
중국 역사서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마한 사람들은 금은보다 옥을 귀히 여겼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신미국 사람들도 옥을 가장 귀중한 제보로 여겼고 귀중한 만큼 자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위신재(威信財) 역할, 위세품으로 여겼다.
송지면 군곡리에선 생명의 의미를 담은 굽은 유리옥 거푸집도 나왔다. 굽은 유리옥은 초승달과 비슷한 모양으로 몸체의 한쪽에 구멍을 뚫어 끈을 맬 수 있게 한 옥장식품으로 중국 일부와 아시아 지역에서 출토되지만 한반도와 일본에서 크게 유행했다. 굽은 옥은 맹수의 용감함을 상징하는 송곳니,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는 태아, 누에 등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송지면 군곡리와 경주 황성동에서 굽은 유리옥의 거푸집이 처음 발견된 후 포항과, 김해, 경주, 대구 그리고 일본 규슈지방에서 거푸집이 발견되고 있어 당대의 교류상을 엿볼 수 있다.
한반도에서 옥이 사용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다. 이때의 옥은 여러 광물질을 인위적으로 혼합해 만든 유리 옥이 아닌 자연석 광물을 깎아 만든 옥이다. 이러한 옥은 청동기시대 들어 장신구의 기능을 넘어 무기와 함께 특별한 신분을 상징하는 대상이 되고 초기 철기시대에는 더욱 종교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을 상징하게 된다. 이러한 상징성을 가진 옥이 유리의 유입으로 대량 생산의 길이 열린 것이다.
해상 실크로드로 신미국 발전
한무제가 열었던 해상 실크로드는 신미국의 발전을 앞당겼다.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유입된 철기문화는 농업 생산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고 도기 제작기술은 생활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또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유입된 청동거울과 중국 신나라의 화천(貨泉), 유리옥은 신미국 권력자의 권위를 더욱 강화시켰다.
해남반도를 중심으로 건국된 신미국은 해남반도 곳곳에 분산돼 있던 청동기 세력을 규합해 만든 마한 소국 중 하나였다. 신미국이 해남반도를 중심으로 발전한 것은 현산면에 위치한 백포항 때문이다. 백포항은 중국과 일본, 가야를 잇는 해상경로에 위치했다. 따라서 신미국은 백포항을 통해 한무제가 열었던 해상 실크로드에 합류했고 일찌감치 선진문명을 받아들였다. 신미국이 받아들인 선진문명은 영산강을 통해 육지의 마한 소국들로 전파됐다.
박영자 기자/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