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
얼마 전 할 일 없는 저녁 시간에 TV 리모컨을 돌리다가 내 눈을 잡아끄는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다.
화면 곳곳에 알 수 없는 거대한 산들이 솟아있었다. 그것은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수천 개의 새롭게 솟아난 옷으로 된 산들이었다.
우선 그 방대한 규모에 놀랐고 그 산이 어느 한 나라만 점령한 게 아니라 아프리카 서남부의 가난한 여러 나라의 새로운 풍경이라는 게 더욱 놀랐다.
여기저기 크고 작은 옷 산 위로는 아이들이 뛰어놀기도 하고 꼬챙이로 옷을 뒤적이기도 하고 있었다.
그 산 아래로는 염소들이 풀 대신 옷을 뜯어 먹고 있었고 한쪽으로는 검은 폐수가 흐르고 있었다.
풀밭이 사라지고 새로 생긴 옷 산의 풍경들을 카메라가 가까이 또는 멀리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 같은 여행 프로그램을 즐기던 나에게 이 낯선 풍경들이 주는 이질감이 너무 커다랗게 느껴져서 몰두할 수밖에 없었고 그 옷 산의 실체가 너무나 충격이었다.
그건 세계의 부자 나라들이 버린 옷들이 바다를 건너서 아프리카 대륙에 새로운 풍경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옷 쓰레기라도 수입해야 하는 가난이 낳은 가슴 아픈 현실이다.
물론 선진국 문턱에 진입한 우리나라에서 실려 보낸 헌 옷들도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뒤적이는 옷더미들 사이로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옷들도 쌓여 있었다.
우리 면에도 여러 곳에 있는 헌옷 수거함, 얼마 전에도 내가 한 아름 안 입는 옷을 정리해서 갖다버린 그 헌 옷 수거함이 아프리카 옷 산의 주범이었다.
늘 한해면 두어 번 내가 버린 그 옷들을 지구 반대편의 아프리카 염소들이 없어져 버린 풀 대신 뜯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버린 한 무더기의 옷들이 지구 반대편의 환경과 사람들의 삶에 불행을 만드는 나비효과의 심각성을 몰랐다는 핑계로 면죄부가 되는 건 아닐 것이다.
나는 정말 몰랐다고, 그 옷상자의 옷들이 그냥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가서 재활용되는 거라고 그리 알고 있었다고 내 아픈 양심에 열심히 변명해보았지만, 그 풍경들을 내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아직도 내 옷장에는 철철이 다 못 입는 옷이 얼마나 많은가?
철이 지나면 새 옷을 사 입는 것을 소확행처럼 즐기던 내 생활 습관이 부끄러운 사실임을 생각하게 됐다. 내 정신의 결여를 포장하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내가 죽고 나면 그 많은 옷은 다 어찌하나!
어찌 옷뿐인가, 수많은 생활 잔재들은 어찌하나!
내가 살다가 가고 난 뒤…
이제 그 뒤를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할 때가 된 것을 깨달았다.
삶의 방향 전부는 바꾸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아프리카 옷 산이 주는 메시지를 새기면서 나의 삶을 돌아보며 살아가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