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슬재(牛膝峙)는 과거나 지금도 우슬재(牛膝峙)다

2022-08-17     임일도/전)재광주해남군향우회장
임일도(전)재광주해남군향우 회장)

 

 필자는 옥천면 영춘리에서 우슬재를 넘어 해남읍 서림에 있는 해남중학교까지 왕복 약 10km를 3년간 걸어서 통학했다. 
자동차가 없는 세상은 아니었지만 새벽 4시 통행금지가 해제된 뒤 4시30분에 광주에서 출발한 첫차를 옥천에서 타면 해남터미널에 9시가 넘어 도착했다. 그 시간이면 무조건 지각하기에 버스를 타고 등교할 수가 없었다. 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올 때도 버스시간을 기다려야 되고, 차비 50원을 아끼기 위해 대부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걸어 다녔다. 
버스도 트럭도 우마차도 손수레도 소도 말도 어른도 헉헉거리며 겨우겨우 넘어가는 우슬재를, 13~15세의 어린소년 소녀들이 꿈과 희망(당시는 과반이 중학교 진학을 못했음)을 품고 씩씩하게 걸어 다녔다. 
도시락과 6교시까지 공부할 책을 담은 그 무거운 책가방을 손에 들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3년간 자갈길을 걸어 다녔으니 우슬재 굽이굽이 12계곡 산길마다 추억과 발자취가 없는 곳이 있겠는가? 지금도 승용차로 옥천에서 해남읍을 오고 갈 때는 일부러 추억이 깃든 우슬재를 택해 추억을 더듬어본다. 5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의 추억은 잊을 수가 없다.
우슬재의 지명에 대한 유래는 청소년 시절부터 여러 차례 듣거나 읽은 바가 있다. 
우슬재의 지명은 해남읍에서 보기보다는 옥천에서 해남으로 넘어가는 길을 보면서 생각해야 한다. 지역의 이름을 지을 때는 보통 지형의 생김새나 지역의 특색이나 역사적 사건에서 유래하는 경우가 많고, 또한 지형의 모습을 동물의 생김새나 모양에 비교해서 명명하는 경우도 많다. 
우슬재는 만대산과 덕음산을 잇는 골짜기다. 우슬재의 우측 만대산 쪽은 옥천면 영춘리에 속하고 좌측 덕음산 쪽은 옥천면 송산리에 속한다. 송산리는 행정구역 명칭이고 솔매, 마고, 연화 등 6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뤄져 있다. 솔뫼는 소나무산이었지만, 모양을 보면 소가 누워있는 형상(와우: 臥牛)이며, 바로 옆 마을인 마고는 전에는 마구동(馬廐 : 소나 말이 먹고 자는 곳)이라고 했다.
솔뫼에서 약 500미터 떨어진 동리는 전에는 독리(犢里)라 했는데 그 독자가 송아지 독자다. 어미소한테 막 젖을 떼고 떨어진 송아지(독리)가 어미소가 있는 마구동(현재 마고)을 바라보며 어미소를 찾는 형상이다. 우슬재는 소가 무릎을 꿇고 있는 형상이라 우슬치(牛膝峙: 소우 무릎슬 재치)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옥천면 송산출신으로 조선시대의 대문장가요 명필이신 수원백씨 옥봉 선생(백광훈:1537~1582년)의 2남이 조선조 선조 때 마산면 안정리에 살며 무안현감을 지냈는데, 이 현감 생일잔치에 솔뫼 본가에서 소를 끌고 이 재를 힘들게 넘어가는데 소가 힘들어 그만 미끄러져 무릎을 꿇었다는 데서 우슬치라 했다고도 한다. 
문헌에 의하면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제작)에 우사현(于沙峴: 갈우 모래사 고개현)이라 표기돼 있는데 이를 어조사 우로 볼 것이 아니라 갈우로 보면 (남해의) 모래사장으로 가는 고개가 된다. 1834년에 김정호가 만든 청구도에는 우슬치(牛瑟峙)라고, 또한 그가 1861년에 완성한 대동여지도에도 우슬치(牛膝峙)라고 표기돼있으며, 1921년의 군지(郡誌)에도 우슬치(牛膝峙)라고 표기돼 있다.  
최근에 와서 지리교사이셨던 k씨와 웹툰작가 k씨가 우슬재는 우리말 웃마루재에서 유래한 것이니 지명을 우리말 웃마루재로 바꾸고, 우슬재에 웃마루재라는 표지석을 세워주라는 청을 한 바 있다. 그 근거로, 우는 우리말 웃(위)에서 왔고 우사현의 사(沙)가 모래이고 우슬재의 슬(膝)이 무릎인데 이 발음들이 마루와 비슷하며 마루에서 변형된 것이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문헌이나 구전의 증거도 없다. 뚜렷한 근거나 역사적 근거도 없이 수 백 년 동안 사용해온 지명을 바꾼다거나 두 개의 지명을 사용한다면 혼란만 가져올 뿐이다. 
수 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사용해오고 있고, 근거도 충분한 우슬재(牛膝峙)를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