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뿌리깊은 해남이야기 11 | 공재 초상화 앞에서 지란지교를 꿈꾸다
공재의 자화상은 조선을 대표하는 그림으로 손꼽힌다. 정면을 응시하는 눈과 굳게 다문 입술, 수염 한 올까지도 살아있는 자화상은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그런데 윤두서는 자화상에 자신의 이름을 쓴 적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공재의 자화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까? 윤두서가 세상을 떠나고 7년이 지난 @후에 해남을 찾아온 선비가 있었다. 윤두서의 친구 담헌 이하곤이다. 연동에서 친구의 자화상을 마주한 날의 일기가 이하곤의 문집에 남아있다.(이하곤 저, 이상주 역, 18세기초 호남기행)
“그는 사해를 뛰어넘는 뜻을 지녔다. 나부끼는 긴 수염과 윤택하고 붉은 얼굴을 보고 선인(仙人)이나 검사(劍士)로 의심하지 말라. 그는 빼어난 군자다.” 윤두서의 자화상에 쓰여있는 이 글은 담헌 이하곤이 써주고 간 것이다.
공재는 친구 심득경의 초상화도 남겼다. 38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집안 동생이자 친구였던 심득경의 초상화는 친구가 세상을 떠난지 4개월 후에 그려진 것이다. 기억속에 남아있는 친구의 모습을 붓끝에 되살리는 데, 윤두서는 4개월을 쏟아부었다. 초상화를 받아 든 심득경의 가족들은 깜짝 놀랐다.
“초상화가 터럭 하나 틀리지 않아서 벽에 걸었더니 온 집안이 놀라 울었다”는 글이 초상화에 남아있다. 연구자들은 인물의 외모뿐만 아니라 성품까지 담아낸 명작으로 평가한다.(차미애, 공재 윤두서 일가의 회화)
윤두서가 세상을 떠난지 7년이 지났어도 옛 정을 못 잊어 친구의 고향을 찾아 온 담헌 이하곤. 심득경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마음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친구의 모습을 초상화로 그린 공재 윤두서의 이야기가 눈물겹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지란지교’를 생각했다. 녹우당을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는 공재 윤두서와 친구들의 우정을 기억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