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에겐 고향이 어떤 의미일까

2022-09-13     임일도/전)재광주해남군향우회장
임일도(전)재광주해남군향우 회장)

 

 무소유의 가르침으로 맑고 향기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법정스님은 종교를 떠나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던 우리사회의 큰 스승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큰스님에게 육신이 태어난 고향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크게 깨달은 분들은 “태어났어도 태어난 것이 없고, 죽었어도 죽은 것이 없다(生無生 死無死)”고 한다. 즉, 태어났다는 것은 소립자(인간이 발견한 가장 작은 원소)들이 어떤 인연에 의해 잠시 만나 형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며, 죽는다는 것은 소립자로 구성된 4대 육신(地水火風)이 만났던 인연이 다해 흩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런 분들에게 고향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는 고향이 있다. 인간 박재철(朴在喆:법정스님의 속세 본명)은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에서 1932년 10월8일에 태어나 2010년 3월11일 길상사에서 입적하셨다. 
큰스님이 해남에서 태어났기에 같은 해남 출신들은 자랑스럽게 여기고 때로는 은근히 자긍심도 갖는다. TV나 유튜브에서 큰스님들이 법문(法門)하실 때, 꼭 법정스님의 약력을 소개한다. 다른 분들은 보통 부처님 제자가 되신 때부터 소개가 되는데 법정스님의 약력에는 맨 처음에 ‘1932년 전남 해남출생’이라고 나온다. 올봄에 필자가 순천 송광사로 등산을 갔다 내려오는 길에 그분이 약 17년 간 머물며 수행을 했다는 불일암(佛日菴)을 둘렀다. 불일암 입구에 있는 법정스님 약력에도 맨 먼저 ‘1932년 해남출생’이라고 적혀있다. 불일암으로 올라가는 길이 꽤 경사가 있었지만 그분의 발자취를 밟고 싶어 기쁜 마음으로 무소유길을 따라 올라가 불일암에 도착해 그 유명한 나무의자에도 앉아보고 스님이 생활했던 자취를 둘러봤다.
소년 박재철은 문내면 우수영국민(초등)학교를 다녔다. 날마다 우수영 울돌목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며 자랐을까? 이곳은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군 함선을 대파하고 일본수군 수만 명이 죽은 곳이다. 스무 살의 청년 시절에는, 동족끼리 싸워 백만 명이 죽어가는 6‧25전쟁을 지켜보며 인간의 생사에 관해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24세의 전남대학교 철학과 4학년 학생 박재철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생사란 무엇인가? 그리고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고향집을 떠났다. 고향 땅에 있는 대흥사로 갈까도 생각을 했지만 고향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야된다고 생각하고 고향을 떠났다고 한다. 어려운 시절 대학까지 보내준 부모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한없이 무거웠지만 큰 결심을 포기할 수 없었다고 한다. 떠나기 전 부모님이 지어준 재철이라는 이름을 마지막으로 불러보니 눈시울이 붉어지고 울컥 울음이 치솟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리움과 과거를 잊고, 오직 모든 번뇌와 망상을 끊고 자유인이 되기 위해 출가를 했다.
최근 해남군에서 법정스님의 생가 자리에 ‘법정스님 마을도서관’을 개관하고 스님의 유품과 사진을 전시하고 포토존과 조망대 등을 설치했다. 원래 생가를 복원하려 했지만,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도 남기지 말고, 사리도 찾지 말고 탑도 비도 세우지 말라”는 스님의 유지가 있어 이를 참작해 마을도서관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마저도 허락하실까 하는 망설임은 없지 않으나, 아무튼 해남군의 선택으로 고향의 역할은 어느 정도 했다고 생각한다.
스님은 누구보다 무소유를 몸소 실천하고 가신 분이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꼭 필요한 만큼만 가지라는 뜻이다. 무소유가 잘못 해석돼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라는 뜻으로 오해를 받을까 염려하시고, 말년에 법문하실 때 “무소유가 가난을 찬양하고 권고한 것이 아니니, 우리 모두 부자가 됐으면 좋겠다”고 하시고 “그러나 부자가 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거나, 분에 넘치는 재물을 탐한다거나 물질에 집착하는 것보다는 안빈락도(安貧樂道) 하는 맑은 가난이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라고 고구정녕(苦口叮寧:입이 쓰도록 당부한다는 불교용어)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