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뿌리깊은 해남이야기 13 | 명량대첩비를 찾아라
명량대첩비는 우수영 울돌목 가까이에 세워져 있다. 비석은 '13대 133의 신화(참여 적선 모두 더하면 13대 300)'를 낳은 이순신 장군의 빛나는 승리를 적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말기에 이 비석이 철거돼 경복궁 뒤뜰에 매장된 일이 있다. 비석이 일본의 기운을 꺾는다며, 명량대첩비를 철거하러 우수영에 왔던 이는 전남경찰 간부 아베라는 자다. 주민들의 협조를 얻지 못한 그는 초등학교 상급생들을 동원해야 했다. 철거된 비석은 배에 실려 서울로 옮겨졌고, 경복궁 근정전 뒤뜰 깊숙이 파묻혔다. 일본 관리들은 이 비석을 인천 앞바다에 수장시킬 계획이었는데, 책임자가 죽거나 병원 신세를 지는 바람에 포기하고 근정전으로 옮겼다는 증언(정춘원, 문내면 선두리 문화마을)이 있다.(해남 문화원, 설화로 꽃피는 땅끝 해남)1945년 해방이 되자 해남 사람들 사이에서 명량대첩비를 찾아와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문내면 김대환씨 등을 비롯한 해남의 청년들이 팔을 걷고 나섰다. 해남 사람들은 비석의 행방을 까맣게 모른 체 서울로 향했는데, 다행히 군정청 직원들이 비석이 묻힌 곳을 알려주었다. 군정청은 비석을 기차로 목포까지 싣고 갈 수 있도록 도와줬다. 목포에서는 배를 이용해 우수영까지 옮겨왔다. 이 과정에서 많이 비용이 들어갔는데, 해남 사람들은 물론 신안, 무안, 영암, 완도 사람들이 모아준 경비로 충당할 수 있었다. 비석이 다시 세워진 곳은 우수영의 영창이었다. 비석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때는 1950년 3월 15일이다.그런데 믿기 어려운 증언이 있다.(정춘원) 명량대첩비가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다. 비석은 6‧25와 4‧19, 그리고 5‧18때도 눈물(땀)을 흘렸다고 한다. 나라를 사랑하는 이순신 장군의 넋이 비석에 깃든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