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뿌리깊은 해남이야기 18 | 조선 풍속화의 효시는 공재 윤두서였다
우리나라 풍속화를 이야기하자면 김홍도나 신윤복을 떠올리기 쉽다. 윤두서가 우리나라 풍속화의 아버지요 효시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윤두서 이전에도 궁중기록화나 문인 계회도 같은 넓은 의미의 풍속화는 있었지만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담은, 진정한 의미의 풍속화는 윤두서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서울대학교 안휘준 교수는 말한다.
“풍속화는 윤두서가 그리기 시작하고 조영석, 강희언, 김두량 등이 그 뒤를 따름으로써 그 기반이 다져지고 그 터전 위에서 김홍도, 김득신, 신윤복 등의 화원 출신 대가들이 풍속화의 꽃을 만발하게 하였다.(국립광주박물관, 공재윤두서, 2014)”
윤두서의 풍속화는 세 단계를 거쳐서 발전해왔다. 첫 단계를 보여주는 작품은 <경전목우도>다. 농부가 소를 몰고 밭을 가는 그림으로 배경을 이루는 자연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농부는 작게 소극적으로 그렸다.
나물 캐는 두 여인을 그린 <채애도>와 짚신짜는 남자를 그린 <짚신짜기>에서는 인물과 산수배경의 비중이 반반이다. 윤두서 풍속화의 마지막 변화를 보여주는 그림은 <선차도>다.
두 남자가 기계를 이용해 목기를 깎는 모습을 그린 이 그림에서는 배경을 깨끗하게 지우고 인물만 남겨뒀다. 인물과 풍속을 강조하기 위해 배경을 지우는 풍속화의 전형을 제시한 것이다.
정제된 화면에 서민의 일상생활을 화폭에 담아낸 윤두서의 풍속화는 조선 후기 미술계에 쓰나미를 몰고 왔다. 공재 윤두서의 그림을 모방(倣)해서 그렸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밝힌 작품도 보인다. 국
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강희언의 작품 제목은 <방(倣)공재(恭齋)석공공석도(石工攻石圖)>다. 공재의 그림 <석공(石工)이 돌을 깨는, 돌을 공격하는(攻石) 그림(圖)>을 모방해서 그렸다는 의미다.
실제로 두 작품은 너무나 비슷해서 전문가가 아니면 육안으로 구분할 수 없다. 강세황도 윤두서의 그림을 본받아서 <방공재(倣恭齋)춘강연우도>를 그린 바 있다.
윤두서는 녹우당의 울타리에 갇히지 않고 조선 전체를 변화시킨 위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