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뿌리깊은 해남이야기 20 | 해남 녹우당은 다산 정약용의 외갓집
해남 녹우당을 들어서면서 다산 정약용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 앞에서 다산의 모습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까? 아시는 독자도 있겠지만 해남 녹우당은 다산의 외갓집이다. 다산의 어머니가 공재 윤두서의 손자 딸이었으니 공재는 다산의 외할아버지, 정확히는 외증조부다.
그런데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다산의 얼굴이 공재와 많이 닮았다는 것. 다산의 현손(손자의 손자)인 정규영이 남긴 <다산선생연보>에 나오는 내용이다. “공재의 조그마한 초상화가 지금도 남아있다. 다산의 얼굴 모습과 수염이 이분을 많이 닮았다.”
<다산선생연보>에는 다산이 일찍이 문인들에게 했다는 말도 있다. “나의 정분(精分)은 외가에서 받은 것이 많다.” 다산의 외모뿐만 아니라 정기(精氣)까지 공재와 외가쪽을 닮았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이런 기록을 다산의 후손이 남겼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다산은 외갓집, 특별히 공재 할아버지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 듯한데, 공재에 대한 다산의 생각을 보여주는 편지가 그의 문집에 있다.
“공재께서는 성현의 재질을 타고나시고 호걸의 뜻을 지니셨기에 저작하신 것에 이러한 종류가 많습니다. 내외 자손 중에서 그분의 정기를 한점이라도 얻은 자라면 반드시 뛰어난 수기(秀氣)를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다산이 유배지 강진에서 18년을 보낸 것은 일신의 불행이었지만, 유배지가 자신이 흠모하는 외갓집에서 반나절 거리에 있었다는 사실은 행운이었다.
박석무는 <다산기행>에서 이렇게 말한다. “다산은 외갓집에서 고산 이후 공재에 이르는 서적들을 읽을 수 있었고, 그 집안의 학문적 전통도 이어받을 수 있었다.”
다산이 해남의 외가에서만 도움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말년에 저술과 교육에 몰두할 수 있도록 다산초당을 지어준 사람들은 강진 귤동의 해남윤씨들이었다.
나중에 자신의 외동딸을 시집보내 다산과 사돈을 맺은 집안도 강진 목리의 해남윤씨 가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