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56세, 이제야 실수하고 고뇌했을 아버지가 보입니다
화원면 명천식씨는 큰 틀 속에서만 바라봤던 아버지가 나와 같은 성장통을 겪는 한 명의 인간이었음을, 당신을 보낸 뒤에 「흔적」이란 책을 통해 밝히고 있다.
화순병원으로 향하던 날 아버지는 1시간30분 내내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말씀을 하신다. 목이 좋지 않으니 그만 좀 하시라고 해도 “사람들하고 꼭 술을 한잔씩 하면서 지내라. 보증을 서지 말아라, 엄마에게 잘해라” 등.
그때까지도 나에게 있어 아버지는 아버지라는 거창한 틀 안의 존재였다. 가족들에게 너무도 엄격하셨던 아버지, 아버지의 기분에 따라 전 가족의 기분도 출렁거렸던 날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때 중환자실에서 만난 아버지는 “나 안보고 싶더냐” 하신다. 뼈만 앙상히 남은 손으로 나를 부여 잡던 아버지는 너무도 작아져 있었다.
내 나이 56세, 당신 나이 84세, 이제야 거창한 틀 속의 아버지가 아닌 한 명의 인간이 내 앞에 있다. 나와 같이 실수하고 하루하루 고단한 삶을 이겨내기 위해 고뇌했을 평범한 존재.
나의 아버지 광길은 1939년 일제강점기 때 화원면 장수리에서 3남2녀의 막둥이로 태어났다. 당신이 태어나 처음 대한 나라는 대한제국이 아닌 일제강점기였고 초등학생 때는 6‧25동란이 일어났다. 그 속에서도 삶은 이어졌다.
중학교 입학에 부풀어 있던 어느 날, 당신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이젠 나의 아버지, 어린 광길의 등엔 책가방 대신 지게가 지어졌다.
어른들과 같이 지게를 지고 나무를 나르는데 나무 짐은 자꾸 쏟아지고, 따라서 광길은 어른들이 쉬는 시간에도 등에서 나무 짐을 내릴 수 없었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그러던 어느 날 누가 송아지를 키워 어미소를 만들어주면 그 어미에게서 낳은 송아지는 갖게 된다는 말에 솔깃한 어린 광길은 송아지를 가져와 키우고, 돈을 많이 준다는 말에 신안 섬에 들어가 염전 광부도 된다. 또 목포에서 화원 양화리 노선의 여객선에서 잡부일을 하고 화원 친척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1년 삯 10가마를 집안 살림에 보탰다.
군 휴가 중 21살의 아버지는 키가 작은 17세 진소순 소녀와 결혼한 후 손수레에 나무짐과 솥단지를 싣고 분가했다. 어머니는 나뭇짐 속에 묻히는 키 작은 소녀였다. 새로 산 옷마다 길이가 너무 긴 어머니였다.
결혼 후 가족의 생계가 또 그의 어깨에 얹혀졌다.
여전히 남의 집에서 머슴을 살고 화원 목장 선착장에서 무거운 짐을 날라 배에 싣는 잡부일을 했다. 1년 동안 번 돈 4만원, 1만5,000원을 저축했다. 돈이 모이면 비탈진 산을 매수해 개간했다. 그때부터 어머님 손엔 늘 돌이 들려졌다. 산비탈 돌을 주워내며 일궈낸 논밭. 당신들 사이에서 태어난 1남5녀의 생계였다.
아버지는 가계부를 직접 작성했다. 50년간 기록한 아버지의 가계부에는 당신 삶의 빼곡한 여정이 그대로 담겨 있다.
장손인 나는 대학까지 졸업시키고 딸 4명은 고등학교까지 진학시켰다. 우리 형제는 성장하는 동안 부모의 질곡의 삶을 함께했다. 학교가 파하면 논밭으로 달려가야 했던 청소년 시절, 아버지는 결코 어머니에게도, 자녀들에게도 다정한 존재가 아니었다. 엄격하고 무서웠다.
어머니와도 자주 싸우셨다. 그런데 어머니가 보이지 않으시면 하루에도 열 두 번을 더 찾으셨다. 막둥이로 태어났던 아버지는 이른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책가방 대신 지게를 짊어져야 했다. 그래서였을까. 아버지에게 있어 어머니는 투정의 대상, 나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줘야 할 무한의 존재였을지 모른다.
이 땅의 모든 자식들이 그러듯 아버지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아버지였다.
아버지 벨소리에 모두가 잠에서 깼다. 손주들이 내려왔다며 보러오신 것이다.
아버지는 자식과 손주를 늘 보아야 했다. 어디를 출타하면 늘 있는 곳을 알려야 하고 돌아오는 시간까지 계산하며 기다리시는 아버지가 부담스럽다.
아버지께서 닭장을 청소하고 계신다. 퉁명스럽게 아버지 그렇게 하면 되겠어요? 분명 나의 감정은 아버지 고생하시는데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인데 감정이 엇나간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는 내가 잠들었을 때 맛있는 국을 가져오시고 힘든 다리로 40kg 쌀가마를 2층으로 옮겨와 내려놓고 가신다. 따르릉 전화벨이 울린다. 오늘도 아버지는 아들 식사를 걱정한다.
아버지는 늘 자식 자랑을 달고 다니셨다. 큰딸은 살림 밑천이라 뭐든 잘한다, 작은딸 사무실은 면장 사무실보다 크더라, 우수영 흥농을 생각하시는지 넷째는 흥농회사에 다닌다….
중학교 입학하던 때 아버지의 성장통은 멈췄다.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가야 한다는 질긴 삶이 당신을 사람과 자식과의 관계 성장통을 멈추게 한 것이다. 그러나 당신만의 방식으로 자식들을 사랑하고 어머니를 위안했다.
아버지 나이 76세, 6월 오후 어느 날 화원 후산리 바다로 자애를 잡으러 가자고 하신다.
V자형 그물을 들쳐메고 바다로 들어간 아버지는 물속에서 그물을 밀고 다니신다. 그리고 30분도 안됐는데 많이 잡았다고 하신다. 그릇 절반뿐인데 힘이 부치신거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바다엘 가면 그래도 먹을 것이 생기기에 바닷길을 나섰다. 그때를 잊지 못해 매년 6월이면 자애를 잡기 위해 바다로 나선다.
그렇게 아버지는 나에게 넉넉한 바다를 안겨 주셨다.
아버지는 한 개비 담배도 세 번씩 나눠 피우셨다. 무엇이든 쓰고 또 쓰시며 평생 절약이 몸에 배어 있으셨다. 그렇게 자수성가의 길을 걸었다. 늘 절약이 몸에 배어 있어 자식들이 장성한 후에도 외식한 기억이 별로 없다.
아버지는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시다 2020년 당신의 소원대로 집에서 돌아가셨다.
임종을 앞두고 아버지는 나에게 뭐라 하시는데 겨우 혀만 움직이셨다. 생과 사의 차이는 너무도 짧았다. 그 경계선은 과연 있을까.
근대화의 주역이었던 우리들의 아버지들은 항상 일 속에 있었다. 아내와 자식들간 살가운 대화보단 그저 일이 전부였다. 그게 당신들이 살아야 할 유일한 이유였고 삶의 방식이었다.
당신이 16세의 나이에 지게를 짊어지고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던 이야기 등 숱한 성장과정을 이야기할 때 나는 아버지의 삶으로만 받아들였다.
당신을 보낸 후 나는 성장통을 겪는다. 거창한 틀 속의 아버지가 아닌 한 명의 인간이 내게 왔다 갔음을. 그 여정이 얼마나 위대하고 존엄했던 가를. 평범한 존재가 일궈낸 삶을 이제야 대면한다.
이 기사는 화원면 명천식씨가 기록한 아버지의「흔적」을 재구성해 정리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