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의 거목 가시다 -故김광호 친구를 애도하며

2023-02-28     정숙녀(미국 시카고)
정숙녀(미국 시카고)

 

 어느날 서울에 있는 친구로부터 비보를 들었습니다. 해남의 큰 울타리가 무너졌다는 허탈감으로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갑자기 고향이 사라져 버린 듯도 했고 소중한 자산의  일부가 무너져 나간 듯도 했습니다. 해남을 떠난 지는 햇수를 헤아릴 수 없이 오래전이지만 아직도 해남이라는 고향은 원색빛깔로 생생하게 내 가슴에 살아있는데… 이제는 그리움의 땅 고향에 가도 그곳에 아는 이가 하나도 없다는 황량함에 처연해진 가슴을 진정시키기 어려웠습니다.
8만리 먼 타국에서 디아스포라인으로 반세기가 넘도록 살아온 사람이 찾아온 고향에는 친지가 단 한사람도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큰 외로움으로 부각돼 왔습니다. 김광호 의장은 내가 고향을 찾아가서 전화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향인이었습니다. 그는 내 동창생의 전부였고 고향 친구의 전부였고 고향의 전부이기도 했습니다. 이젠 그 한 분마저도 사라진 것입니다. 고향과의 끈이 뚝 끊어지고 있는 듯한 아픔이었습니다. 
그분은 소년처럼 세파에 젖지 않은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지요. 더하여 어떤 인간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해남에서 낳아서 80년간 같은 장소에서 살고 있다는 말에는 그분만의 어떤 철학이 있는 듯했습니다. 때로 친구들을 모아 점심을 사는 경우에는 본인은 얼른 식사를 마치고 친구들이 즡겨 먹는 광경을 정감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며 그들에게 더 필요한 음식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따뜻한 눈길을 저는 여러 번 훔쳐보았습니다. 해남동창들은 참으로 훈훈한 가슴을 지닌 그럴듯한 리더(leader)를 가졌구나 하고 내심 갈채를 보내곤 했었습니다. 말하지 않고 말을 하는 격조 높은 인격의 소유자였습니다. 해남 인구가 한때는 10만이 넘었는데 지금은 7만도 못 된다고 고향의 인구 감소를 걱정스러워하는 말을 여러 번 되뇌었습니다. 참으로 고향을 아끼고 있다는 생각을 절감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조용조용 우회적인 방식으로 말하지만 속에는 웅변이 담겨 있었고 해남을 짊어지고 가는 생생한 삶의 실체를 만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해서 나에게 애향심을 눈 띄어 주기도 했습니다. 나이 태를 늘려가면서 메마른 시간을 사는 여러 친구들에게 쉼터가 되어준 향우였습니다. 애향심에 불타는 한사람의 거목을 보내자니 아픔의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군요. 매일 걸어도 그 길이 좋은 것처럼 오래 알고 지난 사이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배웁니다. 남에 대한 이타적 호의를 가지고 살던 분, 우리에게 고요한 기쁨과 깊은 신뢰를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벗을 의지하며 즐거웠던 것입니다. 어두운 인간의 촌락을 떠나 하늘의 밝은 본향을 찾아가셨습니까? 죽음이 없는 삶은 없다 했고 죽음은 진리라 들었습니다만 사별의 아픔에 우리 벗들은 함께 오열하고 있습니다.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간절한 염원을 담아내면서 모자람 없는 삶을 살았고 고장과 이웃과 친구를 사랑하다 간 해남의 큰 별이었던 분, 그분이 남긴 바닥을 알 수 없는 수원의 깊이를 묵상합니다. 그 큰 별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해남의 상공에서 영원히 빛나리라 믿습니다. 죽음은 깨달음이라 합니다. 그분이 남기고 간 깨달음을 우리 벗들은 두 팔 벌려 받아 안고 배울 것입니다. 분명한 인간의 모습과 진정한 인간관계를 제시하면서 붉게 타는 노을 속으로 사라져 가신 분의 뒷모습은 아름다웠습니다. 하늘나라 그곳, 영원히 썩지 않을 집에서 사철 끊임 없는 꽃 향을 즐기면서 편히 쉬소서. 평안하십시오. 2023년 2월 초순 시카고에서 


정숙녀씨는 해남출신으로「미주문학」아동문학 등단 작가로 재외동포문학상과 경희해외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