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뿌리깊은 해남이야기 22 | 조오련, 해남이 낳은 아시아의 물개
해남은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의 고향이다. 해남고등학교를 다니던 그가 서울로 올라왔을 때 그는 생활비는 고사하고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수영을 배웠지만 수영복이 없어서 사각 팬티를 입고 출전할 만큼 형편은 어려웠다.
다행히 조 선수의 실력을 아끼는 사람들이 있어 꿈을 키워갈 수 있었다.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기회가 왔다. 그는 이 대회에서 수영 남자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금메달을 움켜쥐었다. 대한민국의 스포츠 역사를 새로 쓰는 쾌거였다.
금메달 사냥은 4년 뒤 테헤란에서도 이어졌다.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다시 금메달을 차지했다.
그는 선수 생활에서 물러나기까지 한국 신기록 33개, 대회 신기록 17개를 기록했다. 수영선수로는 전무후무한 성과였다.
그는 은퇴 후에도 도전하는 삶을 중단하지 않았다. 1980년에는 55km 대한해협을 13시간16분10초 만에 주파했다.
1982년에는 도버해협 35.4km를 9시간35분에 횡단해 지구인들에게 한국 남아의 기상을 떨쳤다.
2002년에는 대한해협을 한 번 더 횡단했다. 이듬해에는 한강 700리 종주에도 성공했다. 조오련 선수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대한의 막내 독도다. 2005년에 조오련·조성웅·조성모 3부자가 릴레이로 울릉도~독도 구간 93km를 18시간 만에 주파했다.
2008년에는 혼자서 독도를 33바퀴나 돌았다. 33바퀴는 1919년에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민족대표 33인의 얼을 기리는 의미였다. 민족정기를 선양하려는 의지와 결단이 아니고서는 이뤄질 수 없는 도전이었다.
읍 학동에서 태어난 아시아의 물개가 잠든 곳은 국립대전현충원, 국가공헌자 묘역 47호다.
계곡면 선산에 잠들어 있던 조오련의 공적을 높이 산 국가보훈처가 옮겨갔다. 손기정·서윤복·김일 등에 이어 스포츠인으로서는 6번째다.
1970년대부터 30년 넘게 현역으로 뛰면서 국민들의 가슴에 꿈과 희망을 아로새긴 조오련 선수. 그는 대한의 슈퍼스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