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뿌리깊은 해남이야기 27 | 대흥사 천불전과 다산 정약용의 편지
1817년 겨울. 천불전 전각을 새로 지어놓고 옥불 모실 날을 기다리던 대흥사 완호스님은 가슴이 무너졌다. 불상 768좌를 실은 배가 일본으로 떠내려갔기 때문이다.
스님은 옥불을 실은 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느라 아주 바다에서 살았다. 이때의 상황을 담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편지가 있다.
“완호 스님은 여태 바닷가에 머물고 있고(옥불을 싣고 떠내려 간) 배는 아득히 돌아올 기약이 없으니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이듬해 여름에 옥불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대흥사로 보낸 편지도 있다. 옥불에 대한 다산의 관심이 지대했던 듯하다.
“작년 겨울 석불이 동쪽으로 떠내려가 (완호스님이) 눈물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안타까웠는데) 바람을 받아 배가 와서 마침내 뜻하던 일이 이뤄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산은 편지에서 특별히 완호스님을 위로했다. 편지는 옥불에 대한 부탁으로 이어진다.
“훗날 뉘라서 어느 것이 먼저 온 300개의 부처이고 어느 것이 동쪽으로 떠내려갔던 700개의 부처인줄 알겠습니까? 반드시 부처의 등에다 일(日)자를 써서 일본으로부터 온 것임을 적어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불상들이 뒤섞이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편지를 보내서 불상에 일(日)자를 쓰도록 부탁한 사람이 다산 정약용 선생이고, 불상에 일(日)자를 쓴 사람들은 대흥사의 스님들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산은 편지에서 일(日), 일본(日本)을 쓰되 소전체(小篆體)로 쓸 것을 부탁했고, 대흥사의 옥불에 남은 글씨도 소전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쓴 두 편의 편지는 2011년에 나온 정민 교수의 책 「다산의 재발견」을 통해서 원문과 번역문이 처음 공개됐다. 이 편지가 나오기 전까지는, 해남으로 돌아온 불상에 일(日)또는 일본(日本)이라는 표시를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이런 표시를 남긴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알 길이 없었다.
불상을 해남으로 돌려보내기가 섭섭했던 일본 사람들이 불상에 일(日)자를 남긴 것이라는 추측을 싣고 있는 자료도 있다. 사실에 근거해서 바로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