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농단 고발했던 고산, 용기 있는 정치인이었다
지난 4월28일 경기도 남양주시 고산촌 체육공원에서 고산 윤선도 시비 제막식이 있었다. 이날 제막식에는 종손 윤성철 내외분과 해남윤씨 귤정공 후손을 비롯한 남양주시 관계자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고산은 조선시대 제일의 시조시인만은 아니었다.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른 용기 있는 정치인이었다. 그런 면을 엿볼 수 있는 사례가 병진소 사건이다. 고산은 20세 때 승보시에 연달아 장원하고 26세 때는 진사시에 장원을 해 성균관 유생이 됐다. 그리고 광해군 8년(1616년) 그의 나이 30세 때, 예조판서 이이첨의 국정농단을 낱낱이 밝히며 처형할 것을 주장했다. 이것이 병진소 사건이다.
고산은 상소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신의 집안은 3대 동안 국가의 녹을 먹었고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니, 만약 나라에 위급한 일이 일어나면 국난에 달려 나가 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생각건데 간신이 나라를 그르치는 것이 이러하고, 나라가 위태롭기가 이러한데, 남쪽과 북쪽의 오랑캐들이 이런 틈을 타서 침입해 온다면 비록 난리를 피하여 구차스럽게 살고자 하더라도 또한 좋은 방책이 없을 것이며 어디 도망갈 곳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 보탬도 없는 곳에서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오늘날 전하를 위해서 죽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신의 말을 옳게 여기신다면 종묘사직의 복이요, 백성들의 다행일 것이며, 비록 옳지 않다고 여기시어 신이 죽게 되더라도 사책에는 빛이 나게 될 것입니다.”
40여 년간 교직에 몸담고 한국국공립고등학교장회 회장까지 역임한 바 있는 필자가 시비 제막식 축사 도중 감정에 목이 메 잠시 머뭇거리게 된 것은 병진소에 얽힌 이런저런 사연이 갑자기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국정농단을 고한 병진소 사건으로 되려 고산은 유배를 가게 되는데, 유배 생활은 함경도 경원, 경상도 기장 영덕, 함경도 삼우, 전라도 광양 등에서 15여년간 계속됐고 해배됐어도 관직에 복귀하지 않고 은둔하며 살았다. 이런 연유로 고산의 적거지는 전국 각지에 있고 그 자리에는 이를 기념하는 고산의 시비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 남양주시 수석동 역시 고산이 얼마간 머물렀던 곳이다. 지금은 고산로라는 도로 명칭만 있지만 윤선도의 호 고산은 이곳에 있던 고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이번에 건립된 고산 윤선도 시비는 오우가 전문과 어부사시사 일부 그리고 몽천요 등 3편이다. 몽천요에는 자신의 호가 된 고산에서 한강을 바라보며 지은 시로 당시 고산의 처지와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어찌 보면 밝은 빛과 따사로움을 주는 태양이 외로워 보이는 것처럼, 진리와 진실을 외치는 자는 늘 외로울 수밖에 없었던가! 외로울 고(孤), 고산은 조선시대에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진실을 고하며 외롭게 살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바르게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 같기에 그분의 시를 다시 한번 음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