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가 암울하니 김대중 선생님이 더욱 그립다

2023-09-06     임일도/전)재광주해남군향우회장
임일도/전)재광주해남군향우회장

 

 지난 8월18일은 김대중 대통령 서거 14주년 기일이었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이라는 호칭보다는 김대중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더 좋아한다. 그분은 항상 국민과 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고 몸소 실천하신 분이기에 우리 모두의 선생님이요 우상이다. 
억압받고 암울한 군사독재 시절에는 목숨 걸고 저항하며,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부르짖었다. 
그로 인해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고, 수많은 세월 동안 감옥생활을 했고 연금을 당했다. 그래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오히려 그 시간에 더 많은 공부를 해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그분은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 대중 경제에 대한 해박한 지식, 평화적 민족통일에 대한 지혜, 함께 사는 복지사회, 노동자들의 생존권 보장, 약자들의 인권 보장, 용서와 화해, 평화적인 인류의 공존 등에 대해 해박한 이론과 실천력을 가진 위대한 지도자였다.
내가 그분을 처음 본 것은 1967년 5월25일 당시 15세의 소년 시절 해남읍 서림 광장이었다. 
그해 실시되는 제6대 대통령선거를 위해 신민당(민주당 전신) Y후보를 비롯해 다수의 연사들이 유세를 했는데 그때 40대 초반의 김대중 의원도 유세를 했다. 
나는 앞에 앉아 열심히 듣고 박수 치며 연호했는데, 대통령 후보보다 오히려 찬조 유세자인 김대중 의원이 더 인상 깊게 남았다. 
그때 나는 중학교 때 배운 도산 안창호 선생이 청중들 앞에서 했다는 ‘쾌재정(快哉亭) 연설’을 연상했다. 뛰어난 언변과 식견, 군사독재를 종식하고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는 외침, 거기다 인간적인 매력까지 완전히 감동적이었다. 
이후 나는 광주로 올라와 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그분이 광주, 전남에 와서 유세했던 연설장에는 한 번도 빠짐없이 참석해 열심히 경청하고 박수 치며 함성과 연호를 보냈다. 
또 집으로 돌아온 후 인상 깊었던 내용은 반드시 노트(잡기장)에 기록했고 50년이 넘은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그때의 기록을 보니 참석했던 일자와 장소를 알 수 있었다. 1967년 5월25일 해남읍 서림 광장, 1968년 봄 광주 천변, 그리고 가을 광주공원 광장의 시국 대강연회, 1969년 2월21일 나주 국회의원 재선거 지원 유세, 1969년 5월3일 계림초등학교 운동장의 3선개헌 반대 유세, 1969년 8월12일 벌교장터 국회의원 재선거 지원 유세(그날 밤 난 해남 오는 버스가 없어 벌교역 앞 넓적 바위에서 잠), 1969년 9월6일 광주 서석초등학교 운동장, 1969년 10월4일 효동초등학교 운동장에서의 3선개헌 반대 유세, 1970년 7월19일 광주학생회관 사상 대강연회, 1970년 11월1일 김대중 대통령 후보 광주유세, 1971년 4월19일 해남읍 서림 광장 대통령 후보 연설회, 1980년 3월 서울의 봄 시절 동국대학교 강연회, 1987년 대통령 후보 시, 전주역 광장, 광주교대 운동장, 서울 보라매공원, 조선대학교 운동장 등 유세장에 빠짐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1987년 대선 때는 김대중 총재 명의의 찬조 연설원의 위촉장을 받고, 송지 산정장터, 문내장터, 황산 남리장터, 화원, 송지 소재지 등 해남군 일원에서 당시 지역 K 국회의원과 연사가 돼 군부독재 종식 및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평화통일을 위해 김대중 후보를 찍자고 외쳤다. 
이후에는 출판과 미디어 기술의 발전으로 이분의 저서와 녹음테이프, 동영상 테이프를 구매해 시청하며 환호했다. 젊은 시절의 정말 좋은 추억이었다.
그 후 교수가 되면서부터는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음성적으로 적극 응원했다. 
세월이 흘러 2009년 8월18일 우리 민족은 큰 지도자를 잃었다. 나는 서울로 올라가 유해가 있는 모 대학병원 빈소에 가서 헌화하고 조문했으며, 그리고 다음 해인 2010년 1주기 때는, 광주YMCA 1층에서 추도하고「김대중 자서전」도 2권 구매했다. 
그동안 그분에 대한 지지와 흠모는 얼핏 보면 무조건적이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그분이 걸어온 길과 사상 그리고 정책이 내 생각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박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장으로서 선생님을 그렇게 핍박했던 김형욱씨가 그의 회고록에서 말했듯이 선생님은 “백 년에 한사람 나올까 말까 한 인물”이다. 요사이 국내 정치가 양쪽으로 갈라져 심하게 대립하고, 미래가 암울하니 김대중 선생님이 더욱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