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훈 아버지, 김광주 작가
잡지사 기자이자 문인인 ‘나’는 신진여류 시인으로 행세하는 양공주 소니아를 알게 된다. 밑바닥 생활에 지친 ‘나’는 소니아를 찾게 되고 어두운 뒷골목의 진상을 목격하게 된다. 양공주인 소니아에게 미쳐서 가산을 탕진하는 중년노인의 슬픈 모습, 인신매매의 현장을, 또 이재민 아파트촌에서 밤도둑이 저지른 비극을 보게 된다.
소니아의 천진스러운 딸 미리의 모습, 하룻밤 사이에 이 모두를 목격하고 사회의 어두운 단면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나’는 소니아를 잊게 되기를 또한 바란다. 그러나 소니아는 길에서, 미군기관에서, 명랑하고 초월적일 만큼 행복한 얼굴이다. 결국 양공주라고 돌팔매질을 받으면서 소니아는 군중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한 소니아를 ‘나’는 앉아서 바라봐야만 한다.
이상은, 1950년에 발표한 고 김광주 선생의 단편소설「악야(惡夜)」의 줄거리다. 우리는 대개 선생을 무협지 작가로만 알고 있지, 그가「결혼도박」,「혼혈아」그리고 장편「석방인」, 「장미의 침실」, 수필집「춘우송(春雨頌)」이 있으며,「뇌우(雷雨)」노신단 편집 등을 번역한 일은 잘 모르고 있다.
얼마 전 김훈 소설가를 떠올리며 부친 김광주 작가를 기리는 심포지엄이 내 기억에 일어났다. 새롭게 조명한다는 의미만으로 잊혀질 만한 작가를 발굴하고 찾는 일은 매우 감회스러운 일이다. 김재용 원광대 교수는, “김광주는 그동안 알려진 것보다 훨씬 중요한 작가이자 지식인”이라고 말했고, “한반도 남쪽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지역, 문화 공동체에서 김광주가 지닌 역할을 면밀이 연구하고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설파했다. 위에서 지적한 사실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는 1910년에 지금의 수원 화성행궁(行宮) 근처인 수원시 신풍동에서 태어났다. 수원공립보통학교(현 신풍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일공립 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를 5학년 때 자퇴했다. 그리고 1929년 중국 상하이로 가서 아나키스트들과 어울렸다고 한다. 때는 일제(日帝) 때였으니까 수긍이 갈만한 일일 것이다. 그의 아들이자 소설가인 김훈(金勳) 작가는 심포지엄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 아버지는 억압과 야만의 시대에 태어나 살다 가셨습니다. 저항하기에는 억압과 야만의 힘이 너무 컸죠.
그분에게 저항이란 방랑, 파탄, 절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어요. 아버지가 저에게 물려준 것은 두 가지, 살인적 가난과 억압적인 정치구조였습니다.”
그 시대에는 정신이 똑바로 박혀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매우 비참한 현실이요, 생활상인 것이다. 1937년이 되자, 상하이가 일본에 점령, 함락되자 신변에 위험을 느끼자 상하이를 탈출해 해방되던 1945년까지 중국 동북부를 떠돌다가 귀국했다. 그리고 1947년부터 7년간 경향신문의 문화부장을 지냈다.
1961년에는 경향신문에 연재를 시작하고 단행본 「정협지」를 출간해 선풍적인 인기를 얻는다. 이어 삼국지, 수호지를 번역해 신문에 연재, 신문소설의 전성기를 이뤘다.
김훈 작가는 계속해 술회하고 있다.
“아버지는 나라가 망한 1910년에 태어나고, 나는 나라가 새로 선 1948년에 태어났다. 1973년 아버지가 사망 할 때 나는 군대에서 제대했다. 그때 진해에 유신이 선포되고 언론이 장악됐다. 나는 아버지의 업을 비극적으로 계승하게 됐다. 부패한 정치권력과 일상화된 국가폭력에 넌더리를 치며 아버지는 살다 가셨다.”
그는 계속해서 아버지를 얘기한다.
“아버지의 아나키즘은 어떤 이념이나 사유의 틀을 갖춘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체험에서 자연 발생한 것이다.”
그럴듯한 표현이다. 대륙적인 기질을 지닌 그는 어떤 논리 같은 걸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자연적인 취향과 풍모를 지녔을 뿐인 것 같다.
김훈 작가를 고향 해남에서 다시, 인문학으로 만난 것은 크고 가치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