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해들과 용왕님이 눈을 뜬다

2024-01-22     윤지선/땅끝아해 활동가
                              윤지선(땅끝아해 활동가)

 

 청룡이 와 있다고 까치설이 요란하다. 띠는 본래 입춘에야 바뀌지만 임박한 음력 우리설 만삭의 새해 속에 들어 있는 용의 탄생을 미리 축하하는 시간. 그런데 십이지지 모두 실존의 동물이건만 상상의 동물이 왜 들어가 있을까?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텃밭샘으로 불리던 시절, 관사 원룸 창틈으로 보이는 달마산은 그날의 날씨를 알려주곤 했다. 산 너머 동쪽의 아침햇살이 산을 푸르게 보이게 하니 그야말로 거대한 청룡이 바다를 달려와 땅끝 갈두를 올라타고 땅끝 기맥을 따라 위로 올라타는 게 보였다. 
 갑진년의 갑목은 나무 가운데 쓰임새 좋은 재목인 소나무에 비유되고 진토는 용이자 오행의 흙 가운데 따스하고 촉촉한 갯벌에 가깝다. 이름 그대로 수백년 방풍림으로 사람들을 보호해온 송호해변의 소나무는 붉은색 육송과 달리 바다 짠기를 이길 정도로 생명력이 강하다.

 송호해변 소나무 숲에는 다들 흔한 참새들만 보지만 자세히 보면 방울소리를 내며 날 때 산뜻한 노란점이 매력있는 방울새가 집단 서식하고 있다. 
해변가 한 곁에는 1938년 조선총독부에서 ‘천연기념물 제54호 해남학도래지’라고 새겨넣은 비석이 있어 불과 100년 전만 해도 해마다 수백마리의 두루미가 내려와 학춤을 추던 진광경이 펼쳐지던 곳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파도 높은 다음 날이면 땅끝바다 용왕님은 종종 내게 선물을 보내시기도 했다. 뒹구는 커다란 떡굴 사이에 반짝이는 주먹만한 수정돌 하나는 용왕님의 어금니만 같았다. 반지를 내밀며 고백하는 것도 아닌데 그 어금니를 사랑니처럼 들고 와 나는 그렇게 용왕과 사랑에 빠졌던 것일까? 지난 해에는 천년을 잠들어있던 고려 목선이 발견돼 젊은 연구자들이 여러 날 정성 들여 발굴 작업을 하기도 했다. 
도시 생활을 영영 끝내고 내려와 땅끝 아줌마로 산 지 10년. 땅의 끝에서 받은 위로와 은혜는 한없이 크다. 

 여기서 만난 사람들께도 감사했지만, 가장 큰 고마움을 온 삶으로 갚고 싶은 존재는 바로 땅끝 자연 그 자체이다. 특히나 코로나 시기에 태어난 첫 아이를 어디 맡길 데도 없을 때 온전히 돌봐주신 땅끝 바다. 물 빠지고 따뜻하게 데워진 얕은 조수 웅덩이에 아이를 내려놓으면 몇 시간이고 나도 아이도 안심하고 놀아도 되는 언제든 믿고 맡길 수 있는 대지 어머니의 따뜻한 품 그 자체였다.
내려오기 전 전국의 산과 바다를 꽤 다녀봤지만 아기들을 위해 이만큼 안전한 바다는 보지 못한 것 같다. 
아이를 보육시설에 보낸 평일 낮에는 땅끝 자연을 더 깊이 만나며 공부하기 위해 ‘해남탐조모임’을 결성해 산새와 바닷새뿐만 아니라 해남의 모든 생물다양성을 조사했다. 혼자 봐 오다가 같이 보니 더 잘 보인다. 10년 사이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도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운 자연이 살아 숨 쉬고 있어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함께 지키며 나누고 싶어졌다. 
혼자서는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그래서 땅끝 대자연과 그 자연의 일부이자 전부인 아이 하나를 온전히 키우기 위해서라도 함께 자라는 또래들을 만나야겠다 싶어 땅끝의 엄마들과 아이들과 ‘땅끝아해’라는 이름으로 미취학 아이들의 자연 나들이 모임을 시작했다. 아해는 아이들의 옛말이자 서남해 꼭짓점에서 뜨고 지는 날마다의 해의 의미도 담고 있다. 
지난해 인구 조사에 따르면, 송지면에 주소지를 둔 미취학 유아의 숫자만도 108명. 전복과 김양식 2세대의 고향으로 U턴 귀촌한 젊은이들이 다시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는 곳이다. 
읍내권을 제외하고 전국 면단위 유아 인구로도 이례적이다. 
 내 아이를 온전한 한 사람으로 키워내기 위해 엄마들과 자연을 사랑하는 이모 삼촌들과 함께 이곳 땅끝의 오래된 미래를 공부하며 육아시스템 불모지가 아닌 아이 키우기 좋은 곳이 되도록 힘써볼 양이다. 오래오래 내 아이의 자랑스러운 고향으로 길이 보존되며 가꿔가길 바란다. 해남우리신문에 연재를 시작하면서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온몸으로 땅끝 자연을 만나며 자라는 아해들과 해남의 자연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