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을 아는 정치인이 그립다
입춘이 멀어 아직은 엄동설한이다. 그럼에도 정치권은 4월10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후끈 달아올랐다.
야당 사람이 여당으로, 여당에서 안 될 듯 싶으니 야당으로 줄을 서는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발버둥치는 정치인들의 안타까운 모습이 나를 슬프게 한다.
유교사상이 지배했던 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은 사람됨의 으뜸 덕목으로 군자로 꼽았다. 그리고 그가 추구했던 이상적인 삶의 자세는 수기치인이다. 내적으로 자신의 인격을 갈고 닦는 일이 수기요, 치인은 사회 활동 즉 외적으로 타인을 다스리는 정치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수기치인! 얼마나 아름다운 선비 정신이며 군자다운 행동인가. 그리고 부족한 부분은 상피 정신으로 보완했다.
상피는 스스로 저지른 범죄나 실수에 대해 인간이 느끼는 부끄러운 감정으로 볼이 붉어지는 특징이 있다. 자기 자신의 다스림이 최고의 다스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의 존재는 우리가 반복하는 행위 그 자체다’라고 규정지었다.
지난해 12월15일자 워싱턴 포스트지의 거짓말장이를 상징하는 <올해의 피노키오> 명단에는 정치인이 가장 많다.
명단에는 전‧현직 대통령 트럼프와 바이든이 포함돼 있으며, 트럼프는 9년 연속 선정돼 정치인의 부도덕성이 잘 드러나 있다. 정치문화 발전이 유난히 더디거나 가끔 후퇴하는 것은 이런 속성 때문이며, 설령 정치 권력이 바뀐다 해도 정치문화는 달라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수갑차고 감옥으로 끌려가면서도 잘못했다거나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하는 정치인의 모습을 TV 뉴스에서는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정치인 모두를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 지금은 폐지됐지만 예전에 제이티비씨에서 저녁 뉴스를 마감하면서 그날의 중요한 뉴스를 촌평하는 앵커 브리핑이 있었다. 손석희 아나운서가 진행했는데, 2019년 4월4일자 ‘노회찬에게 작별을 고합니다’의 제목 브리핑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노회찬은 앞과 뒤가 같은 사람이고 처음과 끝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진심이었습니다. 제가 그를 속속들이 알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정치인 노회찬은 노동운동가 노회찬과 같은 사람이었고, 또한 정치인 노회찬은 휴머니스트로서의 자연인 노회찬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즉 노회찬은 돈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돈 받은 사실이 끝내 부끄러워 목숨마저 버린 사람이라는 것.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비리를 지닌 사람들의 행태를 떠올린다면, 우리는 세상을 등진 그의 행위를 미화할 순 없지만, 그가 가졌던 부끄러움은 존중해줄 수 있다는 것이라고.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끝맺고 있다.
무엇이 한 발자국이라도 세상을 살만하게 만드는가. 우리들의 선택이다. 영원한 가치, 보편적 진리, 유구한 전통 자체만으로는 세상이 더 선해지거나 발전하지 않는다.
금수저 사용자가 모여 흙수저 사용자의 불편을 해결할 수 없는 것은 흙수저가 무엇이 어떻게 불편한가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