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이 야생과 미래세대의 공존 시작점이 되길
백두산에 호랑이, 지리산에 반달가슴곰, 땅끝에는 담비가 산다. 도시숲에는 담비가 살지 않는다. 하지만 해남의 주요 산마다 말벌을 씹어먹고 고욤감씨를 먹고 고라니 멧돼지 새끼를 사냥해 먹은 담비똥이 나타나니, 이미 오래 호랑이를 대신해 산신령 역할을 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저 높고 깊은 곳에서 해남을 오랫동안 지켜온 크고 작은 야생동물들. 인간도 비인간 동물종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해남의 주민들 가운데 하나. 더구나 이렇게 광활하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숲은 과연 누가 가꿨을까.
백두대간 깊은 산 다니던 시절에 봤던 소년 같은 동걸씨가 생태학자가 됐다는 소식에 반가웠다. 그리고 이태 전 동물권 전문 출판사를 통해 「숲에서 태어나 길 위에 서다」라는 로드킬에 대한 책을 펴냈다기에 전라남도교육청해남도서관과 함께 그를 초대했다. 먼길을 마다 않고 아침 일찍부터 황산중과 북평중 전교생 아이들을 만나 열띤 강의를 해줬다.
‘해남의 야생동물’이라는 소제목으로 만나는 생생한 사진에 내가 무인카메라를 확인하며 느꼈던 감정을 아이들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전교생 아이들이 “지금 여기 해남에 저 친구들이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고?” 눈을 반짝이며 놀라워했다.
해남땅에 먼저 깃들어 살아온 야생 원주민 얼굴과의 첫 조우이자, 해남 땅에서 태어나 자라고 있는 인간과 비인간 포유류 미래세대의 첫 만남이었다. 어른들과 잘 닦인 도로를 지나며 죽어있는 동물들을 보곤 했겠지만 길죽음 PTSD 로드킬 트라우마에 대한 시원한 답변을 해주는 어른은 없었으리라. 이날 현장과학자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마음이 뜨거워진 듯했다.
저녁엔 전라남도교육청해남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가 이어졌다. 초등 1학년부터 해남고등학교 학생들과 머리가 하얀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까지 남녀노소 다양한 연령층이 모여 있었다. 안타까운 길 위에서의 생명의 죽음을 막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지, 지금 나의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얼지 스스로 질문하며 같이 찾아보자는 적극적인 질문들이 이어졌다.
마지막에 서초 3학년 학생 왈, “그런데 왜 인간들이 동물들을 죽여놓고 구하려고 하는 거예요?” 정말 몰라서 해맑게 묻는 선문답에 죽비를 맞은 듯하다.
지구별에 가장 나중에 나타난 막내 생물종인 인간이 10분에 1종씩 멸종의 역사를 쓰고 있는 6번째 대멸종기에 우리 스스로 저지른 잘못이기 때문에, “죽이는 것도 살릴 수 있는 것도 인간의 몫일 거야”라고 못다한 답을 하고 싶다.
한번 갇히면 빠져나오지 못해 덫이 되고 있는 직강하형 농수로에 대한 질문도 나왔다. 저자의 책 뒤에 나왔듯이 농민도 공사하는 사람도 떳떳한 밥한술을 먹기 위해 V자형 농수로로 이제는 제발 전환되기를. 우동걸 박사를 비롯 오래 연구한 현장과학자들이 대안 제시를 내놓은 지 꽤 지났는데도 아직도 적용되는데 시차가 있는 모양이다. 이토록 실질적인 사례와 대안 정책을 마련하고 실행하는 군 공무원들과 길 용역 사업체 장이 필수적으로 이 교육을 들어야지 않았나 싶다. 우리의 삶과 전혀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던 야생동물과의 공존 문제는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야생동물 이동통로는 단순히 포유동물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는 영화 <파묘> 속 대사만이 아니다. 인간의 길 때문에 야생의 길이 끊기면서 서식처가 단절되고 파편화되면 근친교배로 종다양성을 잃고 자연도태에 이르게 된다. 우산종 깃대종이랄 수 있는 상위 동물 아래로 작은 동식물과 곤충과 새들 그리고 인간의 균형이 달려 있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ESG 경영을 자처하는 해남군답게 1조 예산의 일부를 해남군의 비인간 주민인 야생동식물을 위한 예산으로 좀 더 배치해주길 바란다. 야생동물과 미래세대가 공생의 길을 찾는 교육이 일어나고, 공존 서식처와 통로에 대한 우수사례들이 많아지기를. 땅끝이 끝이 아니라 공존의 대안을 선도하는 시작점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