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뿌리깊은 해남이야기 51 | 기록문학의 금자탑-최부의 《표해록》 이야기
최부는 1488년에 제주도에서 배를 띄운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나주로 가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배가 풍랑을 만난다. 최부는 표류하던 배가 중국의 해안에 닿은 후 조선으로 돌아오기까지 136일 동안의 노정을「표해록」에 담았다.
「표해록」은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쓴 최부의 성실성과 뛰어난 관찰력이 낳은 책으로 마르코폴로의「동방견문록」과 어깨를 겨루는 책이다. 이 책은 일본에서 삽화가 더해져서「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 라는 제목으로 출판되고 중국과 미국에서까지 출판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다.
최부의「표해록」은 안개에 싸여있던 중국의 모습을 외부에 알린 책으로 유명하지만, 최부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내용도 많이 담고 있다.
“혹시 저에게 죄가 있으면 저의 몸만 벌주소서. 같이 배를 탄 40여 백성은 죄가 없으니 살려주소서” 1488년 윤1월 5일. 최부가 하늘에 올린 기도문의 일부다.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뱃사람들을 구하고자 했던 지도자의 결연한 마음이 눈물겹다.
최부 일행은 빗물에 젖은 옷을 짜서 물을 얻고, 오줌을 마시기도 하면서 중국의 바닷가에 도착했지만, 해적으로 의심을 받으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다. 최부를 만난 중국의 관리들은 궁금한 점이 많았던 듯하다.
1488년 2월17일의 일기는 천년 전의 전쟁을 언급한다. “그대 나라에 어떤 좋은 기술이 있기에 수와 당의 병사를 물리칠 수 있었느냐?” 최부도 궁금한 것을 많이 묻는다.
1488년 3월23일의 일기에는 가뭄을 극복할 수 있는 수차(水車)의 기능과 제작방법에 대한 문답이 나온다. 이 내용을 읽은 성종은 나중에 “최부의 지휘아래 수차(水車)를 만들도록 하라”고 지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농부들을 도와주고 싶었던 최부와 성종의 마음이 읽혀진다.
최부의「표해록」은 중국 동부의 지리와 문화를 기록한「지리서」로서도 손색이 없다. 한글로 번역된 책이 많으니 일독을 권한다. 최부 선생에 관한 기본 정보 몇 가지. 선생의 호는 금남(錦南)이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나주(錦城)와 터 잡고 살면서 제자들을 길렀던 해남(海南)에서 한 자씩 가져다가 호를 지었다. 선생은 미암 유희춘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최부(崔溥)로 소개했는데 [한국고전종합DB]의 [고전번역서]항목에서는 최보(崔溥)로만 검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