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뿌리깊은 해남이야기 52 | 「표해록」 저자 최부는 어떤 사람일까

2024-05-13     글,그림=김마루(향우, 웹툰작가)

 

야은 길재의 절의와 기개를 이어받은 신진사대부. 연산군에 맞서 날선 비판을 쏟아냈던 선비. 갑자사화의 희생자. 그가 바로「표해록」의 저자 금남 최부다. 
최부가 해남에 끼친 영향은 특별하다. 그는 나주에서 태어났지만 해남정씨의 사위가 된 후로는 해남에 거주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제자들 가운데는 나중에 해남윤씨의 입향조가 된 어초은 윤효정이 있다. 그의 가문에서 윤선도와 윤두서 같은 인물들이 배출된다. 조선 중기의 대문호 석천 임억령의 숙부이자 스승이었던 임우리, 미암 유희춘의 아버지 유계린도 최부에게서 배웠다. 큰 스승이었던 최부는 해남의 푸른 하늘에 조선 선비의 혼을 또렷이 새겼다. 호남을 대표하는 세 가문이 해남에서 나온 것은 오롯이 최부의 공로다.
최부는 성종13년 일등으로 알성급제 할 만큼 문장이 뛰어났다. 사헌부 감찰을 비롯해 홍문관 응교, 교리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친 그는《동국통감》과《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 참여한 실력있는 학자였다. 그는《동국통감》에 실린 사론을 통해서 많은 충신들을 살려냈다. 
난폭한 왕을 섬기고 처자를 죽였다는 이유로 계백장군을 깎아내리는 학자들을 향해서 “계백은 나라가 망할 줄 알면서도 그 몸을 아끼지 않았으며, 처자를 죽인 일은 처가 더럽혀지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내린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변호하고, 계백이 충신 중의 으뜸이라고 강변했다. 조선의 건국에 저항했던 이색, 정몽주 같은 고려의 신하들도 최부의 붓끝에서 충신으로 다시 태어났다.
한편 최부는 수차(水車)를 만들어 보급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표해록」에서 수차 이야기를 읽은 성종의 명을 받들어 수차를 만든 이가 최부다. 호서지방에 큰 가뭄이 들었을 때 연산군은 최부를 보내 수차제조방법을 가르치게 했다. 이때 최부는 호서지방에서 4개월을 머무르면서 농민들을 지도했다. 최부는 물론 성종과 연산군도 농민들을 아끼고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절이 어지러웠다. 훈구세력은 사림파였던 최부를 곱게 보지 않았고 결국 갑자사화를 빌미로 목숨을 빼앗았다. 실록은 그날의 비극을 이렇게 전한다. 
“공렴(公廉) 정직하고 경서와 역사에 능통하여 문사(文詞)가 풍부하였고, 간관(諫官)이 되어서는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 조야가 모두 그의 죽음을 애석해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