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석 디자이너의 기다리는 나무의 염원

2024-06-11     김신/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디자인 칼럼니스트

 

 박주석은 파리국제포스터살롱에서 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은 그래픽 디자이너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나무’를 주제로 작품전을 개최합니다. 그의 작품을 보면 그가 나무로부터 어떤 영감을 받았으며 해남의 관객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해남에는 ‘수성송’이라는 500년 된 유명한 나무가 있지만, 박주석이 작품에 활용한 대상은 군청 앞에 있는 여덟 그루의 나무입니다. 오히려 평범한 나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평범성’이야말로 나무의 본질이 아닐까요? 공기가 그렇듯이 가장 소중한 것은 늘 평범하지요. 그 평범성을 발견하는 것이 창의성의 출발입니다. 박주석은 사람이 늘 만나는 그 평범한 나무를 발견해보라고 다시 한번 느껴보라고 관객에게 제안합니다. 그 방법으로 먼저 군청 앞 여덟 그루의 나무를 사진 찍고, 그것을 단색으로 그래픽화했습니다. 그래픽 버전으로 바꿈으로써 이 나무들은 군청 앞에 놓인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존재를 넘어 보편적이고 신화적인 존재로 이동합니다. 
이렇게 여러 컷으로 그래픽화한 나무 이미지를 배경으로 박주석은 ‘계승’, ‘융합’ ‘해남의 봄’, ‘창조’, ‘고정관념 탈피’, ‘열정’, ‘사랑’, ‘스밈’과 같은 키워드를 뽑아냅니다. 이 키워드는 나무의 보편성인 동시에 해남의 관객에게 전하는 작가의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 키워드가 있지만, 저는 그 핵심에 사람이 놓치기 쉬운 나무의 아주 중요한 성질이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을 바로 ‘기다림’입니다. 저는 이 전시회가 ‘기다림’에 관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나무는 단 한번 사람들의 주목을 끌 때가 있습니다. 바로 꽃을 피울 때입니다. 꽃은 움직일 수 없는 나무가 벌과 나비, 사람을 매개로 번식을 하려고 피우는 간절한 몸부림입니다. 스스로 할 수 없으므로 곤충에게는 꿀이라는 에너지를 주고,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이라는 감상의 대상을 줌으로써 그 대가로 번식을 합니다. 
곤충과 사람이라는 타자를 이용하지 않고는 번식이 불가능하니 얼마나 절박할까요? 하지만 꽃을 피우는 것은 나무로서는 너무나 큰 에너지를 쏟아내야 하는 일이니 그 시간이 불과 1주일을 넘지 않습니다. 나무로서는 그 시간이 바로 창조의 순간입니다. 꽃을 피우는 것은 대단히 창조적입니다. 그 결과가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하며, 다른 생명들에게 기쁨을 줍니까? 나머지는 기다림입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나날의 연속은 아닙니다. 다음 번식을 위해 숨을 쉬는데, 나무의 숨쉬기는 다른 생명에게 산소를 공급해줍니다. 어쩌면 그 숨쉬는 기다림의 순간들, 그 생존의 평범한 나날들이야말로 나무의 첫 번째 본질이 아닐까요? 그 다음 꽃을 피우는 창조의 순간은 두 번째 본질일 것입니다. 
창의성은 융합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즉 여러 사람들의 아이디어, 여러 지식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창의력이 나옵니다. 나무도 그렇습니다. 나무는 다른 생명체와 협력하여 번식을 합니다. 나무가 에너지를 합성하는 과정에서 산소를 주는 것, 꿀이라는 에너지를 주는 것 역시 일종의 융합이 아니겠습니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말합니다. 
“강은 자신의 물을 마시지 않고, 태양은 스스로를 비추지 않고, 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먹지 않으며, 꽃은 자신을 위해 향기를 퍼트리지 않는다.” 
자연은 왜 그렇게 할까요? 남을 위한 것이 곧 자신을 위한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융합의 본질이며, 그 결과 창의성을 낳습니다. 
박주석은 전시 기획 의도에서 “디자인이란 자연과 합의된 아름다움”이라고 밝힙니다. 자연의 어떤 성향, 어떤 태도와 합의해야 하는 걸까요? 
나무는 단 일주일의 짧은 창조와 번식을 위해 기다리고 기다리는 동안 자신이 다른 생명체에게 그보다 훨씬 더 큰 이익을 준다는 사실을 알까요? 그 기다림과 창조가 다른 생명체에게 지구의 자연을 위해 얼마나 소중하고 위대한 일인지를 알까요? 
제가 박주석의 나무 포스터들을 보며 느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무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합니다. 다음 번의 창조를 기다리면서 말이죠. 우리가 나무에게서 배울 것은 바로 기대하지 않는 기다림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