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뿌리깊은 해남이야기 55 | 눈보라 속에 피어난 매화, 고산 윤선도
윤선도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다. 그가 양자가 되어 해남 윤씨가문의 종손이 되고 이어서 승보시에 장원급제했을 때 그의 삶에는 서광이 비치는 듯 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 30세의 성균관 유생 윤선도. 그가 당대의 실세 이이첨을 내치라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윤선도는 그 일로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됐다. 그는 범 무서운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였을까? 경원에서 쓴 그의 시조 <견회요> 다섯 수가 있다.
내 일 망령된 줄 내라하여 모를 손가/이 마음 어리기도 님 위한 탓이로세/아뫼 아무리 일러도 임이 혜여 보소서. 권신을 탄핵한 일이 무모한 일인 것을 압니다. 이이첨 무리가 임금님의 덕을 가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을 뿐입니다. 이렇게 호소하는 내용이다. 이어서 어버이를 그린다. 뫼는 길고 길고 물은 멀고 멀고/어버이 그린 뜻은 많고 많고 하고 하고/어디서 외기러기는 울고 울고 가느니.
자신이 올린 상소로서,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양아버지까지 삭탈관직 됐으니 윤선도의 마음은 얼마나 쓰리고 아팠겠는가? 여기서 윤선도가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내는 방식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는 그때마다 붓을 들어 시조를 남긴다.
땅 설고 물선 유배지 함경도 경원에서 시조라니! 문학인 윤선도의 탄생을 보자면 차가운 눈보라 속에 피어난 한 떨기 매화를 보는 듯하다.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일당이 몰락한 것은 윤선도에게는 천운이었다. 윤선도는 7년의 유배에서 풀려난다. 경사가 이어진다. 42세에 치른 별시 문과초시에 장원급제 하면서 봉림, 인평대군의 스승이 된다. 두 왕자와 함께 한 7년은 꽃피는 봄날이었다.
그런데 50세 되던 해에 병자호란이 터진다. 그는 가솔을 모아 강화도로 갔으나 임금을 알현하지 않고 배를 돌렸다 하여 2년 동안 영덕으로 유배된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74세 노인은 예송논쟁으로 송시열과 대립하면서 다시 7년을 함경도 삼수, 전라도 광양의 유배지로 쫒겨나야 했다. 윤선도가 유배지에서 보낸 기간은 15년이나 된다.
윤선도에게 닥친 불행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탓도 있지만 성품이 강직해 뜻을 굽히지 않았던 윤선도가 스스로 자초한 측면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해볼 때가 있다.
윤선도가 상소를 하나도 올리지 않았더라면 그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가 병자호란같은 외침이 없는 태평성대를 누렸다면 금쇄동이나 보길도를 찾아 냈을까? 아니 <산중신곡>이나 <어부사시사>같은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