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뿌리깊은 해남이야기 56 | 소치 허련은 왜 대흥사 일지암을 찾았을까

2024-06-24     글,그림=김마루(향우, 웹툰작가)

 

 1835년 어느 날. 진도에 살던 허련이 스승을 찾아 대둔사 일지암에 온다. 오륜행실도에 실려있는 삽화를 옮겨 그리면서 화가를 꿈꾸던 허련이 해남에 와서 초의의 제자가 되고, 초의의 주선으로 추사 김정희, 다산의 아들 정학연과 정학유, 신관호, 흥선 대원군, 헌종 임금을 만나면서 큰 화가로 성장하는 과정은 한 편의 대하드라마다.
초의가 보낸 허련의 그림을 본 추사는 깜짝 놀란다. “이같이 뛰어난 인재를 어찌 손잡고 함께 오지 못했소? 만약 서울에 와서 있게 되면 그 진보는 측량할 수 없을 것이오. 즉각 서울로 올라오도록  하시오(如此絶才 何不携手同來 若使來遊京洛 其進不可量也 卽圖京行).”
이 편지를 받은 초의는 허련을 곧바로 서울로 보낸다. 허련에게 공재 윤두서와 윤덕희, 윤용 같은 대가들의 그림을 보여주며 그림에 눈을 뜨게 해 준 이도 초의다. <소치실록>에는 허련이 스스로 녹우당을 찾아간 것으로 돼 있지만 <소치 허련(2008, 돌베개)>의 저자 김상엽은 초의가 안내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녹우당에서 <공재화첩>같은 가보를 낯선 이에게 내어줄 리 없다는 이야기다.
김영호가 번역한 <소치실록(1976, 서문당)>에 허련의 회고담이 나온다. 
“나는 (공재화첩을 보고)침식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때 나는 비로소 그림을 그리는 데에 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數日寢食忘 始知寫有法). 마침내 그 그림들을 빌려가지고 두륜산방에 들어가 몇 달에 걸쳐 옮겨 그렸다. 점점 어느 경지에 도달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遂借之入頭輪山房 費幾月而 摹幾本 稍若有得於境界).”
추사의 제자가 된 허련은 <세한도>를 그린 문인화가이기도 했던 추사의 지도아래 남종문인화의 진면목을 깨치고 나아가 우리나라에 남종문인화를 토착시키는 데 성공하게 된다. 허련이 추사의 초상화를 두 폭이나 남긴 것은 스승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었을 것이다.
진도 운림산방이나 해남 녹우당과 일지암은 거리도 떨어져 있고 별다른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허련-초의-추사에 이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뿐인가?  초의와 추사의 만남은 강진에 내려와 있던 다산과 관련이 있다. 초의는 대둔사 천불전에 모시게 될 천불에 점안을 하러 경주까지 간 일도 있다. 공간과 공간을 연결해 주는 이야기들은 우리가 아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