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뿌리깊은 해남이야기 63 | 《지암일기》둘러보기(6) 조선시대를 기록한 타임캡슐
《지암일기》는 한글로 번역된 책이 1,272쪽이나 된다. 400쪽으로 펴내면 세 권이나 되는 분량이다. 내용을 살피다가 눈에 띄는 내용을 정리했다.
○몸소 조문을 갈 수 없을 때는 그쪽을 향하여 곡을 한다. 이를 망곡(望哭)이라(1693. 4.15.) 한다. ○논밭에 병충해가 심해서 해남 현감이 제관으로 뽑혔다. 이런 제사를 포제(酺祭)라고(1693.7.23.)한다. ○아버지의 죄를 물어 아들을 데려다 장(杖) 20대를(1693.6.5.)쳤다. ○해남 아전의 우두머리가 왔기에 장 30대를(1693.6.25.) 때렸다. ○영감이 북청의 유배지에서 고금도로 옮겨왔는데 천극안치(荐棘安置)까지 더해졌다고(1694.7.2.) 한다. 이는 방 둘레에 탱자나무를 치는 것으로 위리인치보다 무거운 형벌이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생신차례를 지냈다. 돌아가신 분의 생신을 지냈다는(1697.5.25.) 기사가 낯설다. ○말을 타고 가는 자를 보니 분명 상놈이어서 불러서(1693.7.16.) 따졌다. 조선시대에는 양반이 아니면 말을 탈 수 없었나 보다. ○영암 사람이 보리를 납부하지 못 해서 옥에 갇혔는데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1697.6.7.) 한다. ○암행어사 이민영의 소문이 안 좋다. 해남에서는 쌀섬과 명주1동 강진에서는 명주1동과 비단 그리고 쌀 50섬을 배에 실었다고(1698.5.11.) 한다. ○관광(觀光)은 원래 도성이나 대궐에 들어가 문물을 구경한다는 말인데 조선시대에는 과거보러 가는 것을(1998.10.11) 가리킨다. ○해남읍성 남쪽에 신사(神祀)가 마련되었다. 전염병을 내몰기 위한 별신제(別神祭)를 위해서(1698.11.3.)라고 한다. ○명의가 편지하기를 마른 소똥을 방 안팎과 사방에 태워서 그 냄새가 두루 퍼지게 하면 전염병을 물리칠 수 있다고(1698.11.20.) 하였다. ○세자의 병이 나았다. 이에 상감께서 (감사하여) 사형수만 놔두고 모두 석방시키고 죽은 자도 사면하라(1699.2.8.) 명하였다. ○소문에 강진에서 열흘 동안 병으로 죽은 사람이 1,000명에 가깝다고(1699.2.1.) 한다. ○도갑사에 갔는데 스님이 마중나오지 않았기에 주지를 매로 쳐서(1699.4.19.) 경계했다. ○위리안치의 법도는 의금부에서 열쇠를 보내 문을 열어준 후에야 죄인이 문밖으로 나갈 수(1699.2.18.)있다.
《지암일기》에는 풍수지리와 관련된 내용도 많다. 해남 연동을 비롯한 해남의 이곳 저곳을 풍수지리적으로 해석한 지관(地官)의 글들은 윤이후가 따로 정리해두었다. 이 또한 그 시대의 한 단면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