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9일 황산 옥매광산 추모제를 기다리는 이유

2024-08-26     김정훈/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
                  김정훈/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

 

 매년 음력 7월16일이면 조국 해방의 넋이 되어 옥매산 기슭의 항구를 찾는다. 해남군 황산면 옥매산 광산은 비극의 역사가 묻힌 ‘옥매산 광부 수몰 사건’의 시발점이다. 옥매산은 일제강점기 국내 강제 동원 중 최대의 사건이다. 옥매산은 ‘옥매광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때인 1916년부터 1945년 태평양 전쟁 종전까지 명반석 채취 등을 위해 마을 주민·광부 등 수백 명을 강제 동원했다. 일본 제국주의는 1945년 3월 강제 동원한 조선인들을 사전 예고도 없이 강제로 제주도에 끌고 갔다. 우리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발파 기술과 굴착 경험을 제주도 모슬포 부근인 삼방산 해안 동굴이나 방어진지를 파는 데 동원됐다. 
강제 동원은 비극적인 집단 사망사고를 낳았다. 진지 공사에 동원됐던 조상은 5개월 만에 해방이 되자 어렵사리 배를 구해 고향으로 향했다. 225명을 태우고 항해하던 배는 완도군 청산도 앞바다에서 원인 모를 화재로 침몰했다. 탑승자 한국인 222명 중 118명이 수몰됐고 일본인 3명 중 2명이 작고했다. 수몰된 사망자의 나이는 16세부터 40대 중반까지이다. 당시 생존자 증언에 의하면, “일본 배가 지나가는데, 일본 사람들하고 일본말을 할 줄 아는 사람들만 구하고 그냥 가버렸다”고 한다. 
이 사건은 음력 7월16일이면 옥매산 부근 마을인 황산면과 문내면은 초상집이 된다. 유족들의 가슴에 한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사건은 정부의 대표적인 무관심 사례로 수십 년간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정부는「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 ‘국내 강제 동원 피해자’는 제외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옥매광산 광부 강제동원 진상규명과 관련해 1957년, 2005년, 2012년 세 차례 진상을 조사했다. 하지만 별다른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정부의 의지도 부족했다. 공출 품목이었던 명반석의 생산량과 반출량, 노무자의 동원 규모와 강제 동원자 명단 등 기초적인 자료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옥매광산 희생자 유족회 박철희 회장은 “일제강점기 국내 강제 동원 중에서 해남 옥매산이 제일 큰 사건인데 국가가 나서서 해 주는 게 없다. 또 몇 년 전에 옥매산 광부들을 강제 동원한 일본 아사다화학 회사에 직접 찾아갔다. ‘배상을 안 해도 좋으니 당시 착출한 조선인 명단이라도 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아사다화학공업이 지금도 기업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만큼 정부가 관심을 가지면 명단만이라도 자료를 요청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118명의 광부들이 집단 수몰된 ‘옥매광산 광부 집단수몰사건’의 추모조형물은 해남군민들의 1인 1만원 모금으로 건립됐다. 추모제는 그동안 몇몇 유족들이 성금을 모아 지내왔는데 수년 전부터 군민들의 도움으로 뜻깊은 추모제를 매년 진행하게 됐다. 해남군은 조례 개정을 통해 강제 동원 민간인 희생자 위령 사업 지원으로 추모제 비용을 지원하고 매년 해남군수, 군의회 의장, 국회의원, 도의원, 군의원 등이 참석했다. 또한 해남 예술인 등 재능기부로 추모제를 지원했다. 
해남 옥매광산 광부 집단수몰 사건은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사안인데도 해남군이 앞장서 잘하고 있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진상 규명과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을 이뤄야 할 중요한 역사적 소명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