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뿌리깊은 해남이야기 67 | 초의가 만난 사람들 ① 다산 정약용
여기는 강진 귤동의 다산초당. 아침 일찍 대둔사를 출발한 초의가 귤동 입구에 도착한다. 날이 밝자마자 초당의 마당에 나와서 서성거리던 다산의 눈에 먼 발치로 초의가 들어온다. 이 장면을 노래한 다산의 시가 있다.
“송라(松蘿)가 드리워진 좁은 돌길은/구불구불 서대(西臺 다산초당)와 가까이 있네 /이따금 짙은 초록 그늘 속으로 /적막히 스님 하나 찾아오누나.” 수라세석경(垂蘿細石徑) 우곡근서대(紆曲近西臺) 시어녹음리(時於綠陰裡) 적막일승래(寂寞一僧來).
초의가 얼마나 반가웠으면 다산은 이런 시를 남겼을까? 어느 화가가 있어 위의 시를 붓으로 그려낸다면 많은 사랑을 받으리라. 다산과 초의는 1809년에 처음 만났다. 다산은 48세, 초의는 24세였다. 둘은 스승과 제자로 만났다. 다산의 소문을 들은 초의가 강진으로 찾아가서 배움을 청했던 것이다.
초의는 다산의 높은 학문과 인간미에 매료되었다. “골목마다 글 하는 이 차고 넘쳐도, 천 리에 어진 이는 한 사람도 없구나.” 여항만장보(閭巷萬章甫) 천리무일현(千里無一賢).
이렇게 탄식하던 초의가 큰 선비 다산을 만난 것은 천운이 아니었을까? 어느 때는 다산초당에 가려는데 장맛비가 내렸나 보다.
“내 항상 자하동을 그리워하니, 꽃나무들 한창 우거졌겠다. 장맛비가 괴롭게 길을 막아서, 봇짐 묶고 20일을 지나보냈네.” 아사자하동(我思紫霞洞) 화목정분빈(花木正粉繽) 음우고상조(淫雨苦相阻) 속장유이순(束裝踰二旬).
장맛비가 언제나 그치려나 하늘만 쳐다보는 초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둘은 학문적인 면에서나 인격적인 면에서 지음(知音)이라 할만 했다. 초의는 다산초당에 다니면서 <논어>와 <주역> 등 유가의 경전과 시문을 배울 수 있었다. 다산은 초의를 진심으로 아꼈다.
“내가 유배에서 풀리면 내 고향으로 가자. 거기다 암자 하나 짓고 나랑 지내자.” 24년 연하의 제자에게 이렇게 권유했을 정도다.
1815년에 초의는 처음으로 한양에 가서 다산의 집을 찾는다. 이때 다산의 아들 정학연 형제와 추사 형제를 만난다. 스승이 지란지교의 다리를 놓아준 셈이다. 그로부터 3년 뒤에 다산은 유배에서 풀려서 강진을 떠난다.
1830년에 다산과 초의는 한 번 더 만난다. 그리고는 영원한 이별이 찾아온다. 필자는 두 사람의 만남이 마냥 부럽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같은 내 친구야.”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사이였는데 나는 왜 이 노래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