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선물한 집, 새로운 시작의 공간(1)
처음 해남에 내려와 한옥스테이 와카(WAKA)가 될 40년 된 한옥을 구경하던 날, 옆집 할아버지와의 만남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온 우리를 반겨주시며, 옆집에서 숙박업을 하는 것에 대해 흔쾌히 그러라 하셨다. 그 환대 속에서 이곳에서 무언가를 해볼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이후 공사 기간 중에도 신문기사에 났던 내 소식을 보시곤 정말 멋진 일을 하고 있다며 응원해주시곤 했다. 우리가 집을 비운 기간에 뭔 일이 있지는 않은지 들여다 봐주시고, 집이 완성됐을 때는 이렇게 멋진 공간은 처음 본다며 환하게 웃어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와카를 운영한 지 1년쯤 지났을 때, 할아버지께서 갑작스럽게 쓰러지셨고 병원 생활이 잦아지게 되며,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이서 해남 생활을 지속하기가 어려워지셨다. 해남과 서울을 오가는 생활 끝에 할아버지는 가족 모두, 특히 할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을 정리하겠다고 결심하셨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내가 그 집을 사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당시 신분증과 도장을 어디 뒀는지 찾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읍내와 면사무소를 오가며 임시 신분증을 발급받고, 등기소에서 계약서를 작성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이후 할아버지의 자녀분들은 집을 깔끔히 정리해 주셨다. 중요한 짐뿐만 아니라, 남은 자잘한 쓰레기들까지 모두 처리해주고 가시는 모습을 보며 감동을 받았다. 그 따뜻한 기억들은 이후 이 집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큰 원동력이 되었다.
할아버지의 집은 와카와 데칼코마니처럼 닮아있다. 상량문에는 와카는 1979년, 할아버지의 집은 1983년으로 적혀있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사람이 지었다고 했다. 부녀회장님은 할아버지 집을 지을 때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흙을 뭉쳐 기와에 던져준 추억이 있다고 했다. 집의 입구에는 세월이 묻어나는 마루가 있었고, 80년대에 유행하던 모자이크 나무 천장과 벽의 루바패널이 매력적이었다. 새로운 집을 보며 고민이 이어졌다. 기존의 집이 가진 것들을 보존하고 싶은 마음과 새롭게 바꾸고 싶은 마음들이 부딪혔다.
단열과 방수가 되지 않는 기존 시골집에서 살아보니 그 불편함을 절실히 알게 됐고, 이 집을 비슷한 상태로 두고 싶지 않았다.
마을 주민분들은 “지금도 충분히 좋은 집이니 그냥 살라”고 조언했지만, 나는 단순히 겉만 고친 집이 아닌, 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단열과 방수부터 잡고 수리한 와카와 달리,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도배와 장판만 바꿔 살고 있다. 인스타그램에 보여지기엔 충분히 예쁘지만, 살면서 점점 만족도가 떨어졌다. 여름엔 습하고, 겨울엔 춥다. 여름엔 제습기를 틀면 하루에 2번씩 물을 비워줘야 하고, 겨울엔 한 달에 1~2드럼을 써 보일러를 틀어도 춥다. 같은 시기에 와카에 머무를 때 느껴지는 쾌적함과 더욱 비교됐다. 와카는 손님들이 머무는 공간이니, 에어컨이나 보일러를 과하게 트는데도 그 비용이 훨씬 적게 들었다.
그래서 천장부터 내벽, 마루바닥까지 모두 뜯어 기초부터 다시 손을 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에게 “혼자 사는데 그렇게까지 돈을 쓰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단순히 집을 고치는 것을 넘어 나 자신에게 선물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번듯한 와카를 만들어 놓고 정작 단열과 방수가 되지 않는 열악한 집에서 살고 있는 현실은 스스로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했다.
도시에서 온 친구들이 와카를 보고 감탄한 뒤 제가 사는 집에 와서는 “여긴 무섭지 않아?”라고 묻는 반응을 보일 때마다 민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느낀 불편함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