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멘토 김대중 대통령
유년 시절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내게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은 배워야 사람 노릇하며 살 수 있다고 채근하셨다. 당신께서는 배운 것이 없으셨지만 꼭 덧붙여 하시는 말씀이 배움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듣고 배우는 길이 있고 둘째는 자기 혼자서 책을 열심히 읽고 또 읽어 스스로 깨우치는 길이 있으며 셋째는 훌륭한 사람 곁에서 그의 행실을 보고 따라 하면서 배우는 길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 셋 중에서 가장 쉽고 빠른 길은 보고 배우는 길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당시에는 아버지의 이 같은 자식 교육에 대한 강한 집념과 욕심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버지를 산에 묻고 돌아오던 날 집안 어른들로부터 아버지의 고집이 몰락한 여흥 민씨 양반 가문의 체통을 지키려는 몸부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아버지께 부끄럽고 죄송했다. 그러나 이런 아버지의 가르침은 훗날 홍일이와 친구가 돼 그의 집을 드나들며 대통령 앞에서 행동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대통령 내외분은 서로 깍듯이 존칭어를 사용하셨으며 비서진들에게도 하대하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아들 친구들에게도 존대해 주셨으며 언제나 온화한 얼굴과 따뜻한 말씨로 대해주셨다. 예전 우리 집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 대통령을 가까이서 겪어본 사람은 저마다 그분의 인자함에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지칠 줄 모르는 근면성에서 오는 엄청난 독서량, 쉼 없는 메모, 서예와 화초 가꾸기 등은 전문가 못지않게 일가견이 있었다. 남대문 시장에서 파이프용 잎담배를 사고 인사동에서는 서예용 화선지를 사고 또 수많은 신간을 사기 위해 홍일이와 함께했던 시절이 엊그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
다섯 번의 죽을 고비, 10년 동안의 가택 연금, 6년간의 옥살이, 이 가운데 1980~82년 3년 동안 감옥에 계실 때 아내와 세 아들 그리고 큰며느리에게 보낸 29통의 편지 모음집이 저 유명한 김대중 옥중 서신이다.
발간 당시에는 금서로 지정돼 마음대로 살 수 없었고 읽을 수도 없었으며 소지만 해도 감옥에 가는 호랑이처럼 무서운 책이었다.
김대중 옥중 서신에는 정치인으로서 자신이 겪은 고난이나 핍박에 대한 항변은 한 마디도 없다. 목사의 설교집처럼 예수님 이야기, 가족과 국가를 위한 기도문,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역사와 철학, 교양, 자기개발 등 사람이 사람 노릇하며 살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내용들이 가득 담겨있다. 마치 퇴임하는 노교수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들려주는 마지막 강의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반면에 김대중자서전은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과 맞서 싸운 정치인 김대중의 피눈물 나는 진면목을 맛볼 수 있다. 대통령께서는 정치에 대한 자서전 서문 생의 끄트머리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는 정치를 심산유곡에 핀 백합화가 아니라 흙탕물 속에 피어나는 연꽃 같은 것이라 여겼다. 악을 보고 행동하지 않는 은둔과 침묵은 기만이고 위선이다. 내가 훌륭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정치인으로서 살아온 것을 후회하지도 않는다. 지식의 정점에 서 있는 철학자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인류를 위해 몸 바쳐 노력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는 정치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1995년 내 생에 전환점이 된 그해 7월을 잊을 수 없다. 제4대 서울시 의원에 당선돼 사무실 개소식을 하던 날, 홍일이와 김대중 총재께서 직접 참석해 축하와 격려를 해주셨는데 그것이 오늘의 민상금을 만들었다. 대통령이 되셔서는 나를 토지주택공사 감사로 임명해주셨다. 그 사랑을 잊을 수 없다.
대통령께서 서거하신 후에는 매주 화요일에 동작동 현충원 묘소를 참배했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과의 이 아름다운 동행을 잊을 수 없고 이 지면을 통해 고백할 수 있어 자랑스럽고 또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