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뿌리깊은 해남이야기 76 | 일본 경찰의 보고서로 본 이완용 암살의거와 양한묵

2025-01-20     글,그림=김마루(향우, 웹툰작가)

 

 1909년 12월22일에 이완용이 이재명의 칼에 찔려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경찰은 의거 연루자로 25명을 체포한다. 이 의거에서는 천도교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밝혀진다. 당시에 양한묵 선생은 천도교본부에서 현기사장(玄機司長)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다. 동지들 가운데 김용문과 오복원은 천도교 신자로서 양한묵과 잘 아는 사이였다. 
두 사람은 이완용 처단에 관한 동지들의 계획을 양한묵에게 털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행동대장격인 이재명의 존재도 알려준다. 양한묵은 이재명을 불러서 이용구의 처단을 부탁한다. 동지들도 “을사5조약, 정미 7조약을 체결할 때 이용구가 선언서를 발표해 지지했고, 최근에는 합방성명서를 발표한 매국노”라는 이유를 들어 이용구를 처단하기로 결의한다. 그 뒤로 이완용이 피습을 당한 것은 알려진 대로다. 
이쯤에서 정리해보자. 경찰은 양한묵이 이완용의 처단을 지시했다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양한묵이 이용구를 언급한 것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이용구의 처단을 결의한 이들은 동지들이었다. 그러나 이용구 처단계획은 미수에 그쳤다. 경찰이 양한묵을 잡아들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양한묵‧김용문‧오복원 세 사람은 천도교라는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비밀을 함께 나누는 동지들이었다. 오복원은 이재명과 양한묵을 연결해주었다. 양한묵이 이재명을 만난 자리에서(이완용의 처단을 포함한) 전반적인 계획을 공유하고 의논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용문과 오복원은 천도교당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 받은 월급을 동지들의 활동자금으로 사용했다. 양한묵도 이재명에게 수시로 경비를 제공했다. 김용문은 이완용이 명동성당을 방문한다는 사실을 보도한 신문을 입수해서 이재명에게 가져다줬다. 거사에 결정적인 정보를 전해준 것이다. 이처럼 이재명, 김용문, 오복원 셋은 의거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 세 사람의 중심에 양한묵 선생이 있었다. 경찰이 양한묵을 잡아들인 이유다. 끝으로 필자가 참고한 자료를 안내한다. ‘네이버>한국사DB>총리대신 살해음모’에는 경시총감 와카바야시가 작성한 ‘총리대신과 일진회장 기타 살해음모’ 보고서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