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의 나전 이층 책장과 병진소
해남우리신문 1월10일자에 ‘윤선도가 만들어 사용했다. 나전 이층 책장’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셨는지요? 지난해 12월13일에 이어 관련 기사가 한 달 여만에 연속 대서 특필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나는 해남우리신문 애독자로서 고향의 유물과 유적에 관한 기사에 관심이 많고 또 고산의 직계 후손이라서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비단 이번뿐만 아니라 해남우리신문에는 역사와 사적에 관한 기사가 항상 차고 넘친다. 요즘도 백제 시대 이전 마한의 중심지가 해남이라는 기사가 매우 흥미롭다. 이는 신문 편집자께서 사학과 출신이라서일까 하는 생각도 있지만, 오늘날의 시대적 대세가 관광산업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아주 바람직한 기사라고 생각한다.
특히 나는 출향인으로서 타지방 교우들과 교제시 고향을 자랑하거나 소개할 때 해남우리신문 스크랩 기사를 많이 이용하고 있다. 물론 오래전 편집자께서 저술한「해남의 옛 이야기」와 최근의「명량 대첩 승리 해남 불바다가 되다」, 그리고「달마는 신발 한 짝 들고 어디로 갔을까」는 더할 나위없는 교제다.
이번 본지에서 두 차례나 관심을 갖고 크게 기사화한 나전 이층 책장이 국보급 보물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녹우당 나전이층 책장의 공예사적 지위’에 관한 학술 심포지엄이 지난해 12월26일 서울역사박물관(종로구 새문안로55)에서 있었다.
이날의 심포지엄에는 전문가 발제자 5인, 토론자 3인 외에 200여 명의 방청객이 참석했다. 그리고 고산 15세 종손으로 녹우당 문화예술재단 윤성철 이사장께서 참석, 감사와 격려의 말씀이 있었다. 윤선도가 제작 사용했다는 나전이층 책장 (너비 89cm, 깊이 57cm, 높이 73cm)를 다음과 같이 5개 분야로 세분해 각자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1)나전 이층 책장의 가구형식과 가치, 2)나전 이층 책장의 제작 기법, 3)나전 이층 책장 나전의 시대적 양식, 4)조선중기 매죽도와 나전 이층 책장, 5)나전 이층 책장의 과학적 분석이었다.
나전 이층 책장의 제작년대는 대략 17세기 초로 고산께서 성산(현재경남상주) 현감으로 재임시절 병풍과 함께 제작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우리나라 최초 대표적 나전가구로 역사적 의미에서 보존가치가 크다고 주장했다. 예나 지금이나 럭셔리(명품, 귀한 것, 비싼 것) 제품은 서사(스토리텔링)가 붙기 마련이다. 고산의 나전 이층 책장 역시 예외는 아닌 듯 싶다. 결론은 발제자들께서 나전 이층 책장의 제작에 정치적 시대적 배경에 고산의 성정이 크게 작용했다고 강조하는 점이다.
그리고 해남 윤씨가문의 특징으로 삼개옥문 적선지가의 정신을 바탕으로 학문에서도 시경을 좋아하는 가문으로 평가했다. 고산 역시 조선제일의 시조시인 즉 문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이외에 의약, 복서, 음양, 천문, 지리 등 다방면에서 그의 천재성을 엿 볼 수 있는 점도 많이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성균관 유생시절 예조판서 이이첨의 부정부패를 낱낱이 고발한 병진소(광해군 8년 1616년)는 고산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사건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번 기회에 병진소 사건과 함께 고산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