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 - 이 땅의 엄마들에게

2025-05-07     김지영/눙눙길 청년마을 대표, 공인회계사
                         김지영/눙눙길 청년마을 대표, 공인회계사

 

 내 멋대로 살고 있다. 하고 싶은 공부도 다 해봤고, 전세계 30개 넘는 나라에 여행도 다녀봤고, 회계사 일을 하며 멋진 커리어우먼으로도 살아봤다. 지금은 연고 없이 해남에 내려와 시골집을 고치며 하고 싶은 건 다 하며 살고 있다. 결혼도, 출산도 ‘선택’인지라 선택하지 아니한 지금이 그저 편안하다. 그런데도 내 삶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 문득, 2007년 대학 수업 과제로 썼던 리포트가 떠올라 오래된 웹하드를 뒤졌다. 외할머니, 엄마, 이모, 나, 사촌동생까지 3대 여성의 삶을 인터뷰해 한국사회의 구조적 변화와 여성의 생애 경로를 분석했던 글이었다. 나보다 20여 년 앞서 태어난 엄마의 삶만 봐도,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없었고, 자신의 꿈을 펼치기도 어려웠다. 
그에 비하면 나는 정말 복 받은 시대에 태어난 셈이다. 선택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고, 고를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시대. 그리고 나는 그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 그런데 왜 마음 한켠이 여전히 무겁고, 설명할 수 없는 막막함이 남아 있는 걸까. 나는 그 감정의 뿌리를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여성들의 삶에서 찾게 된다. 
나의 엄마, 할머니, 그리고 이 땅의 수많은 엄마들, 할머니들. 저는 알아요. 당신들이 얼마나 많은 걸 견디고 버티며 살아오셨는지. 참아야 했고, 감춰야 했고, 생존을 위해 희생해야 했던 그 시간들 위에 제가 서 있다는 걸요. 당신들의 고단한 삶이 있었기에 저는 이렇게 자유롭게 숨 쉴 수 있어요. 감사해요. 하지만 이제는 제가 그 흐름을 조금 바꿔보려고 해요. 당신들이 물려주신 생존의 감각, 견디는 능력,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저를 짓눌렀던 감정들을 이제는 조금씩 내려놓으려 해요. 저는 이제 저 자신을 위해 살고 싶어요.
어떤 일을 해야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보다, 어떤 삶이 나를 더 편안하게 해주는가를 먼저 들여다보고 싶어요. 희생을 미덕으로 여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왔다면, 이제는 그것을 살아내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신들이 저에게 건넨 삶이라는 선물 안에서, 저는 이제 다른 길을 걸어보려 합니다. 제 목소리로 말하고, 제 감정으로 글을 쓰고, 제 방식대로 살아가는 일. 그것이 새로운 시대에 태어난 제가 할 수 있는 방식의 감사이자 헌사라고 생각해요. 
저는 당신들이 걷지 못했던 길을 걷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어요. 여전히 서툴고 더딜지라도, 저는 저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그래 주셨듯이, 부디 저를 따뜻하게 지켜봐 주세요. 저는 이 삶을 사랑하며, 저를 키워준 당신들의 삶을 기억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 엄마와 할머니의 딸로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저처럼 자신의 방식대로 길을 만들어가고 있어요. 앞으로의 딸들 역시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지요. 
누군가는 가족의 기대를 내려놓고, 누군가는 정해진 역할을 넘어서며, 누군가는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맨발로 걸어가고 있어요.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업을 바꾸고 있어요. 나 하나의 자유가 아니라, 다음 세대 여성들이 덜 미안하고 덜 죄책감 느끼며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요. 저 역시 아직 많이 흔들리고 때로는 무력하지만, 이 흐름 속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용기를 내봅니다.
그러니 이제는, 엄마들이 살아낸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을 기억하고 품에 안은 채 다른 방향으로 한 걸음 내딛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어요. 당신들이 물려준 강인함과 생존의 본능 위에, 저는 기쁨과 선택의 자유, 그리고 나로 살아가는 용기를 덧대어 살아보려 합니다. 그 삶의 모습이 언젠가 당신들께도 ‘참 좋다’는 말로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