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이 단호히 대피를 명했다…10분만 늦었더라면
[‘해남 100개 단체의 마음’ 갑니다-현장 르포] 화염에 녹아내린 영덕군 영덕읍 석리마을 해남 100개 단체 마음 성금 4,550만원 전달
“그날 10분만 대피 방송이 늦었더라면 우리는 모두 화염 안에 갇혔을 겁니다.”
이미상(65) 이장은 산불이 마을을 덮쳤던 그날, 산불 방향을 예의주시했다. 바람이 심상치 않았고 불길이 빠르게 이동했다. 그러나 저 멀리 청송에 있는 불길이 우리 마을을 덮칠 것이란 생각은 0.1%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연기에 질식할 수도, 또 정전과 통신이 끊기면 재앙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밤 8시30분, 주민들에게 가방 하나, 이불 하나 챙겨 마을 앞 방파제로 피신하라는 방송을 했다. 젊은 사람들에게 동네 어르신들을 챙길 것을 요구했다.
이장의 첫 대피 방송에 주민들은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이장은 2차 방송을 통해 단호히 대피를 명했고 이에 주민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그로부터 1시간도 되지 않아 불길이 마을을 덮쳤다.
경북 영덕군 영덕읍 석리. 지난 3월25일 조용한 바닷가 마을은 산불로 하루아침에 폐허가 됐다. 경북 의성, 안동에 이어 청송을 타고 넘어온 불길로 60여 가구 중 52가구가 피해를 입었고 45가구는 전소됐다.
주민들은 그날을 회상하면, 여전히 심장이 뛰고 눈시울을 붉힌다. ‘이대로 죽는 거구나’라고 느꼈던 주민들은 그날 생과 사의 경계에 있었다.
석리마을은 해안 절벽에 위치한 어촌 마을로, 집들이 절벽에 따개비처럼 붙어있다 하여 ‘따개비마을’로 불린다. 한순간 산불이 덮친 밤, 조금만 늦었더라면 길이 좁고, 골목마다 차량이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 과연 누가 살아남았을까.
고령층이 많은 마을이라, 대피에만 20분이 넘게 걸렸다. 주민들은 걸어서 때로는 뛰어서 석리방파제로 대피했고, 이동이 어려운 어르신들은 젊은이들이 마을 뒤편 도로에 주차된 차량으로 급히 이동시키며 마을을 벗어났다. 방파제로 이동한 주민 40명은 배에 타고 바다로 대피했고, 해경 함정에 옮겨 탔다.
마을주민들이 방파제에 도착한 20분 후 마을 전체가 정전이 됐다. 그리고 순식간에 집들이 빨랗게 타올랐다. 불길이 덮치면서 모든 통신이 끊기고 전화도 먹통이 됐다. 센 바람에 불덩이들이 바닥을 휘감아 돌고 하늘을 나는 광경을 주민들은 배에서 지켜봤다. 지금 생각해도 머리가 하얘졌다. 이게 저승 가는 길이구나 싶었다. 그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대나무가 우거졌던 석리마을의 집과 언덕엔 여전히 탄내가 가득했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101세 어르신은 목숨을 잃었다. 요양원과 자식집을 오갔던 어르신이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자연산 돌미역으로 유명한 석리는 올해 미역 채취를 포기했다.
고령층이 주로 거주하는 이곳 마을은 좁은 골목길이어서 지난 5월7일에서야 불에 탄 집들의 철거가 시작됐다. 주민들은 현재 국립청소년해양센터 내 마련된 임시 대피소에 머물고 있다. 마을에 임시주택이 놓이고, 국토부의 복원사업으로 마을은 2~3년이 지나서야 재건될 예정이다. 주민들은 산불 이후 매일 마을에 모여 복구 방향을 논의하고, 철거 현장을 지키며 빠른 복구를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
김영기(69) 노인회장은 “마을 전체가 힘든 일을 겪었지만, 이 일을 통해 감사함이 무엇인지, 대한민국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도움을 주신 땅끝해남과 대한민국 국민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한편 ‘산불피해 돕기-땅끝해남 100개 단체의 마음’에 모아진 성금 4,550만원은 지난 5월9일 마을이 화염에 녹아내려 버린 영덕읍 석리마을에 전달됐다. 전국에서 물품 지원은 풍족하기 에 현금을 전달했다. 또 해남군이 지원한 땅끝햇살 쌀과 햇반도 함께 전했다. 석리마을은 해남 군민, 단체들의 뜻에 따라, 마을 회의를 통해 집이 전소된 45가구에 100만원씩 현금을 지급했다.
이미상 이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너무 감사하다. 주민들이 모든 것을 잃고 힘들어하는데 그저 감사하다”며 거듭 감사함을 전했다.
‘산불피해 돕기-땅끝해남 100개 단체의 마음’은 경북 산불피해를 돕기 위해 구성된 해남사회단체로, 4월 한 달간 성금모금운동을 전개했다. 군민 1만원 성금, 단체 참여로 산불 피해 지역의 복구에 마음을 보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