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것이 곧 나다

2025-06-02     김지영/눙눙길 청년마을 대표, 공인회계사

 

                          김지영/눙눙길 청년마을 대표, 공인회계사

 

‘내가 먹는 것이 곧 나다’라는 말은 해남에 와서 더욱 실감나게 다가왔다. 서울에 살던 시절엔 바쁜 일정 속에서 기름지고 자극적인 것들로 나를 채웠고 속은 늘 부대꼈다. 스트레스를 없애겠다는 핑계로 곁들이던 알콜은 순간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지만, 다음 날이면 마음이 불안하거나 우울했다. 먹는 것이 바뀌면 그 변화는 몸으로 가장 먼저 느껴진다. 속이 편안한 날은 기분도 안정되고, 장이 불편하면 예민해지고 우울해진다. 이 당연한 경험들에는 과학적 기반도 있다. 
지금까지는 뇌와 장이 별개로 움직이는 기관이라고 믿어왔지만, 최근 연구를 통해 뇌와 장이 끊임없이 소통하며,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바로 ‘뇌-장축(Gut-Brain Axis)’이라는 개념이다.
뇌-장축이란, 장(腸)과 뇌(腦)가 신경, 호르몬, 면역체계를 통해 끊임없이 정보를 주고받는 연결축이다. 우리의 장은 단순한 소화기관이 아니라, 1억 개 이상의 뉴런이 분포된 ‘제2의 뇌’로 불린다. 흔히 ‘행복 호르몬’으로 불리는 세로토닌은 신경전달물질로 기분을 조절하고 불안을 가라앉히는 역할을 하는데 이 세로토닌의 약 90%가 장에서 만들어진다. 장내 환경이 건강할수록 감정도 안정되고 잠도 푹 잔다. 반대로 장이 불편하면 뇌도 영향을 받아 스트레스나 불안이 증가하고 불면이 지속될 수 있다. 우리가 평소 “배 아파서 짜증나”, “속이 불편해서 기운이 없어”라고 말하던 일상적인 표현들이나, “배짱이 두둑하다” 같은 표현은 사실상 뇌-장축의 원리를 감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밥상은 그래서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장-뇌축 건강을 위해서는 식이섬유가 풍부한 채소와 제철 과일, 젓갈이나 된장 같은 발효식품을 섭취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신선한 음식은 내 장을 건강하게 만들고, 내 장은 다시 나의 감정과 마음을 조율한다. 내 몸을 돌보는 일은 곧 내 마음을 돌보는 일이다. 자기 돌봄은 요란하거나 거창할 필요가 없다. 
된장국에 넣을 감자를 깎고, 멸치를 넣어 육수를 우리고, 정성껏 쌀을 씻어 밥을 짓는 일. 매일 반복되는 이 평범한 행위가 내 삶을 지탱해 준다. 
더불어, 이런 일상은 내 안의 신경계 회로를 조금씩 다시 짜나가는 작업이기도 하다. 우리의 뇌는 온몸의 신경세포들이 서로 연결된 회로망을 통해 사고, 감정, 감각을 처리한다. 유년기에 형성된 이 회로들은 반복된 스트레스나 억눌린 감정, 생존을 위한 긴장 상태에 길들여져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신경회로는 만 3세 무렵까지 집중적으로 만들어지고, 사용되지 않는 연결은 가지치기하듯 제거된다. 그래서 ‘사람은 잘 안 바뀐다’는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다. 그러나 뇌는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이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자극과 반복된 경험은 기존의 회로를 약화시키고,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 강화할 수 있다. 이를테면 계절의 흐름을 따라 식재료를 고르고, 조용히 밥을 짓고, 음식을 음미하며 몸의 감각에 집중하는 시간은 내가 오랫동안 익숙했던 불안과 조급함의 회로 대신, 평온과 신뢰의 회로를 다시 만들어가는 연습이다. 나는 지금까지의 삶이 늘 조급했고, 끝없는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차렸다. 하지만 지금은 몸을 먼저 듣고, 마음을 따라 사는 삶을 연습 중이다. 그 출발점은 거창하지 않다. 
나를 위해 정성껏 차리는 한 끼의 밥상, 그 위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