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뿌리깊은 해남이야기 88 | 추사 김정희와 대둔사 대웅보전 현판
1840년. 제주도로 귀양을 가던 추사 김정희가 대둔사에 있는 초의를 찾아갔다. 절을 여기저기 둘러보던 추사가 눈을 크게 떴다. 대웅보전 현판글씨가 원교의 작품이었던 것.
“이광사는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자다. 어떻게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버젓이 걸어놓을 수가 있는가” 추사가 호통을 쳤다. 이에 초의는 이광사의 현판을 떼어내고 추사가 써준 글씨를 달았다.
9년 뒤, 유배에서 풀려난 추사가 다시 대둔사에 들렀다. “예전에 떼어낸 원교의 현판 있는가? 그것을 다시 달아주게. 그때는 내가 잘못 보았어.” 이렇게 해서 원교의 글씨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유홍준의「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실려있는 이야기다.
김익두와 허정주의 책「조선명필 창암 이삼만 평전(민속원, 2024)」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추사는 유배길에 전주에도 들렀는데, 이때 창암 이삼만이 찾아왔다. 창암이 조선후기의 3대 명필로 알려지기 전의 이야기다. 당시 추사는 54세, 창암은 71세였다. 백발이 성성한 창암이 고개를 숙였다. “붓을 잡은 지가 30년이 되었지만 아직 글자의 자획도 잘 모릅니다.” 추사의 대답이 매몰차다. “노인장께서는 글씨로 시골에선 밥을 굶지는 않겠습니다.” 마침 원교의 동국진체에 빠져있던 창암의 글씨가 추사의 눈에 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 유배가 풀렸을 때, 선생을 찾아간다. 그러나 창암은 이승에 없었다. 이에 추사는 창암의 묘비에 비문을 썼다. 비문은 창암의 글씨체로 썼다. 대가의 글씨를 몰라본 것을 뉘우치면서, 자신의 추사체 대신 창암의 행운유수체(行雲流水體)로 비문을 쓴 추사.「이삼만 평전」에서는 이를, ‘전해오는 이야기’라고 했다.
그러나 추사가 쓴 비석에 창암의 글씨체가 남아있으니 이야기는 사실일 것이다.
원교와 창암의 글씨에 대한 추사의 평가가 달라지게 된 연유가 궁금하다.
유홍준은 대둔사 대웅보전의 현판을 설명하면서 “(서예의)도를 넘어선 개성의 가치를 외로운 귀양살이 9년에 (추사가) 체득한 것”이라고 풀이했다.해남 대둔사에 가시거든 세 사람의 붓글씨를 찾아보기 바란다. <대웅보전>, <천불전>, <침계루>의 현판은 원교의 작품, <가허루>는 창암 이삼만의 작품, 그리고 <무량수각> 현판은 추사의 글씨체이다.